역경을 딛고 웃음과 희망을 전하다: 뽀빠이 이상용의 인생 이야기
충청남도 서천의 가난한 집안에서 1944년 태어난 이상용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허약했습니다. 영양실조로 미숙아로 태어난 탓에 가족들은 그를 포기하고 갓난아기를 땅에 묻으려까지 했지만, 열두 살이었던 이모가 밤중에 아이를 다시 꺼내 살렸다고 합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상용은 어린 시절 내내 병치레를 했고 여섯 살이 되어서야 걸음을 뗄 정도로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역경을 이겨내고자 그는 십대부터 보디빌딩을 시작했고, 고등학생 때 이미 보디빌더로 활약하며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교내 보디빌딩 대회에서 “미스터 고대”로 뽑혀 화제가 될 만큼, 병약했던 소년은 노력 끝에 누구보다 탄탄한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상용은 대학 졸업 후 ROTC 5기로 임관하여 육군 장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남다른 체력과 투지로 기갑 병과를 택해 전차소대장 임무를 수행했고, 1967년 소위로 임관한 뒤 베트남전에 참전해 1년간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 1970년 3월 육군 중위로 전역한 그는 제대 후 생계를 위해 외판원이며 보험설계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그의 삶에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끼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부터였습니다. 어렵게 살아가던 청년 이상용은 자신의 재능을 믿고 한 가닥 희망을 안은 채, 고향 선배이자 MBC 방송국 PD였던 유수열 씨를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평생 쌓은 체력과 끼를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방송계 데뷔와 뽀빠이 별명의 탄생
1971년 이상용은 CBS 기독교방송에서 방송 진행 보조 역할로 처음 마이크를 잡으며 방송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후 1973년, MBC 예능 프로그램 《유쾌한 청백전》의 오디션 기회를 얻은 그는 당시 무명 신인이었지만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재주를 쏟아부었습니다. 훗날 이상용은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등 쟁쟁한 일류 스타들 틈바구니에서 내 장기를 모두 보여줬다”며 데뷔 초를 떠올렸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 프로그램에 여러 차례 출연하며 알통을 자랑하고 벽돌을 격파하고 가슴근육을 튕기는 등 남다른 퍼포먼스로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그가 선보인 호쾌한 힘자랑 개그 덕분에 점차 만화 캐릭터 ‘뽀빠이’라는 별명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세고 유쾌한 신예 MC의 등장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상용은 조금씩 방송인으로서 인지도를 쌓아갔습니다.
이상용의 거침없는 끼와 에너지는 곧 어린이들을 위한 무대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1975년부터 KBS 《모이자 노래하자》라는 어린이 노래자랑 프로그램 MC를 맡게 된 그는 밝고 힘찬 진행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매주 일요일마다 방송된 이 프로그램을 무려 9년간 진행하며, 이상용은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친근한 ‘뽀빠이 아저씨’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근육질의 팔뚝과 정열적인 진행 스타일로 인해 붙은 별명이지만, 언제나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웃음을 주는 그의 모습에 어린 시청자들은 환호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길에서 우연히 이상용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대신 거수경례를 하곤 했는데, 이는 그가 어린이들에게 영웅 같은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이렇게 뽀빠이 이상용이라는 캐릭터가 탄생하며, 그는 1970~80년대 가장 사랑받는 국민 MC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방송인으로서의 전성기 – 우정의 무대와 국민 MC
이상용의 방송 경력 중 백미는 무엇보다 MBC의 군대 위문 예능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 시절일 것입니다. 1989년 시작된 《우정의 무대》의 진행자로 발탁된 그는, 자신이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도 인정받아 군대 문화를 잘 이해하는 MC로서 활약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전국 각지 군부대를 직접 찾아가 장병들과 함께하는 공개 방송으로, 1990년대 초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상용은 매 회 방송 시작에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장병 여러분~ 충성!”이라는 힘찬 인사말을 외치며 분위기를 달궜고, 병사들은 열광적으로 화답했습니다. 그의 구호 “고향 앞으로, 출발!”, “당신이 있어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등은 그 시절 유행어가 될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군복을 입은 청년들에게 잠시나마 웃음과 위안을 주는 이 무대는, 이상용에게도 인생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남았습니다.
매주 군부대를 돌며 진행된 《우정의 무대》에는 감동의 순간도 많았습니다. 특히 ‘그리운 어머니’ 코너에서는 눈을 가린 장병 앞에 그의 어머니가 깜짝 등장하곤 했는데, 이상용이 “어머니가 오셨을 것 같습니까?”라고 묻고, 장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네, 어머니가 맞습니다... 확실합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늘 절정의 감동을 안겼습니다. 오랜 군 생활 중 처음으로 마주한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아들과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같이 눈물짓는 이상용의 모습에, 안방의 시청자들까지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이렇듯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우정의 무대를 1989년부터 1997년까지 8년 넘게 이끌며, 이상용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MC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사랑과 사회봉사 활동
오랜 기간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인연으로, 이상용은 일찍부터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돕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1980년대 《모이자 노래하자》를 진행하던 당시, 심장병을 앓는 한 아이가 방송 촬영장에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상용은 병든 아이를 외면하지 않고 수술비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어린이보호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치료받지 못하는 어린 환자들을 위해 직접 후원자를 찾고 기금을 마련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렇게 16년 동안 수백 명의 어린이들에게 새 생명을 선물해주었고, 심장병을 비롯한 중증질환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진짜 산타’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며 국가로부터도 감사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방송에서 받은 사랑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던 그의 선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한편, 1970년대부터 이상용은 유명 코미디언, 가수들과 함께 각종 자선 공연을 열며 사회봉사에 힘썼습니다. 1974년에는 한센병 환자를 돕기 위한 원맨쇼 공연을 펼쳤다는 신문 보도가 있을 정도로 그는 방송 밖에서도 늘 어려운 이웃을 위한 무대에 섰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던 이상용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는데, 1996년 말 그가 모아온 어린이 수술 기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입니다. 평생 선의(善意)로 해온 일이 갑작스레 누명을 쓰면서, 그는 큰 충격 속에 애청하던 《우정의 무대》 MC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3개월 간의 수사 끝에 1997년 2월 무혐의 처분을 받으며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지만, 한순간의 오해로 받은 상처는 매우 깊었습니다. 훗날 그는 마음고생이 심해 ‘혐의 없음’이라고 적힌 검찰의 불기소 증명원을 늘 가슴에 지니고 다녔다고 고백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어려움마저 묵묵히 견디며, 자신이 시작한 어린이 돕기 운동의 가치를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새로운 도전 – 성인 개그와 다양한 활동
방송을 잠시 떠나 있던 이상용은 특유의 유머 감각을 살려 색다른 도전에 나섰습니다. 1999년, 후배 개그우먼 문영미와 함께 성인 개그 음반 《뽀빠이 이상용의 폭소열차》를 발표하며 웃음을 전할 새로운 무대에 도전한 것입니다. 어린이 프로그램으로 다져진 깨끗하고 유쾌한 이미지를 넘어, 성인을 위한 코미디 콘텐츠에 도전한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음반에는 당시 다소 파격적인 소재의 유머와 익살스런 연기가 담겼고, 이는 이상용에게 새로운 웃음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KBS 《전국노래자랑》, MBC 《출발 동서남북》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입담을 선보였습니다. 또한 지방 축제나 공개 방송의 사회자로도 러브콜을 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고, 케이블 채널 MBN에서는 《뽀빠이 팔도 유람기》, 지역방송 T브로드에서는 《가자! 시장 속으로》 등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다양한 세대에게 웃음과 추억을 안겨주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이상용의 방송 활동은 이전처럼 전성기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하는 모습으로 대중과 만났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MBC 《늘 푸른 인생》(2008~2014) 등 주로 어르신들을 위한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노년층 관객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또 전국을 돌며 각종 행사의 MC, 강연자로도 맹활약하여, “행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국민 MC”라는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웃음과 재치는 여전했고, 그의 구수한 입담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노년기의 열정과 끝없는 감동
나이가 들어서도 이상용의 삶은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술, 담배를 평생 멀리하고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은 그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탄탄한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실제로 70대 중반에도 50kg짜리 역기를 하루 600번 이상씩, 그것도 60년 넘게 들고 있다며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의 자기관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꾸준한 노력 덕분에 팔순을 바라보던 나이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 달에 수십 건의 행사 사회와 강의를 소화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나는 평생 할 일이 많다. 하루에 행사를 3~4개씩 뛴 적도 있다”던 그의 말처럼, 이상용은 일에 대한 열정과 청춘 같은 체력으로 노년기를 보내며 주변에 긍정의 에너지를 전파했습니다.
오랜 후배들과 시청자들 역시 그런 그의 모습을 존경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2024년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는 MBC 예능 30주년을 맞아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을 초청했는데, 이상용도 무대에 올라 시상자로 특별 참여했습니다.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팔순의 ‘뽀빠이 아저씨’가 환한 미소로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젊은 시절 함께 호흡을 맞춘 개그맨들부터 그를 TV로 보며 자란 후배 예능인들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전설의 MC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날 이상용은 시상 무대에서 “웃음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라는 뭉클한 소감을 남겨, 다시 한 번 대중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5년 5월 9일, 이상용은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향년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 지병도 없이 건강을 자부하던 그였기에 많은 이들이 크게 놀라고 슬퍼했습니다. 비록 이제 우리 곁을 떠났지만, 가난하고 병약했던 아이가 역경을 딛고 일어나 국민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선물한 이야기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언제나 “충성!”을 외치며 웃음을 전하던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 그의 따뜻한 마음과 열정은 남겨진 우리에게 큰 귀감이자 감동으로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