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된다. 부부라는 애증의 미학 - Seattle - 1

한국말은 가끔 무섭게 정확하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

평생을 함께하자던 사람이, 이혼 도장 한 번에 길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하는 남이 되어버리는 세상. 글자의 생김새가 이미 그 진실을 다 말해주고 있다.

주변의 부부들 보면 잉꼬부부 소리 듣던 커플이 갈라서고, 맨날 싸우던 부부가 손주를 보며 함께 늙어간다.

도대체 부부라는 관계는 왜 이렇게 사랑과 미움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걸까. 내가 볼때 사람들은 결혼할 때 '운명적 인연'을 믿는다.

영혼의 단짝, 평생의 동반자. 문제는 그 환상의 기대치가 천장을 친다는 거다. 기대가 100인데 현실이 80이면, 그 20만큼이 고스란히 실망과 원망으로 쌓인다.

애증이 반복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사랑이 클수록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클수록 배신감도 크다.

미움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충족되지 못한 기대의 다른 이름이다.

무관심이라면 미워할 일도 없다. 미워한다는 건 아직 그만큼 기대가 남아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애증은 동전의 양면이고 부부는 그 동전을 평생 돌리며 산다.

이혼이라는 게 그렇다. 그 뜨겁던 사랑이 식는 게 아니라, 기대의 잔고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순간 찍히는 점이다. 어제까지 '여보'였던 사람이 오늘은 '그 사람'이 되고, 도장 한 번에 '남'이 된다. 점 하나 찍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초, 그 점을 찍기까지 쌓인 실망은 수년이다.

재밌는 건 반대도 성립한다는 거다. 생판 '남'이었던 두 사람이 만나 점 하나를 떼어내며 '님'이 된다. 결국 부부란 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생 줄다리기하는 사이다. 그 점을 찍느냐 떼느냐, 매일매일이 선택이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이 점 찍는 방식도 문화마다 다르다는 걸 느낀다. 여기선 이혼이 흔하고 담백하다. 점을 찍고도 아이 양육은 쿨하게 같이 하고, 명절에 전 배우자 가족이 모이기도 한다. 반면 한국식은 점을 찍는 순간 등을 돌리고 영영 남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쪽이 옳다기보단, 기대를 거두는 방식조차 우리가 학습한 문화의 산물이라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냐. 답은 단순하다. 출발선의 기대치를 현실에 맞게 내려놓는 거다. 배우자가 내 모든 결핍을 채워줄 거라는 환상, 영원히 설렐 거라는 착각부터 버려라. 사람은 안 변하고, 결혼은 로맨스가 아니라 동업에 가깝다.

역설적이게도, 기대를 낮춘 부부가 더 오래 간다. 별 기대 안 했는데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면 고맙고, 같이 밥 먹는 평범한 저녁이 감사해진다.

실망은 결국 기대와 현실의 갭에서 태어난다. 갭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대를 바꾸려 들기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기대치를 조정하는 거다.

오해는 말자. 기대를 낮추라는 게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환상을 걷어내고 사람 그 자체를 보라는 거다.

완벽한 배우자를 기대하면 평생 실망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을 받아들이면 의외로 평온이 온다. 인연은 운명이 점지해주는 게 아니라, 매일 점 하나를 떼어내며 '남'을 '님'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의 다른 말이다.

님과 남은 점 하나 차이다. 그 점을 찍을지 떼어낼지는 매일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당신은 오늘 배우자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가. 그 기대가 너무 무거워서, 지금 점 하나를 찍으려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한 번쯤 멈춰서 물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