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에서 한 20년 넘게 살다 보니 영어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같은 뜻인 것 같은데 사람한테 잘못 갖다 붙이면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지는 영어 단어들이 있다.
얼마 전 아기 옷을 구경하다가 웃긴거 하나를 봤다. 앞에 책 그림이 그려져 있고 "READ TO ME, YOU PEASANT"라고 적혀 있었다.
직역하면"나한테 책을 읽어다오, 이 천한 것아"쯤 된다.
아기가 부모를 상것 취급하면서 Peasant 라고 하는 설정이라 웃기라고 만든 옷이다.
그런데 Peasant라는 말을 요즘 미국에서도 사람한테 쓰나?
막상 Peasant 앞에서 Peasant라고 말할만한 강심장은 얼마 없을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미국에는 가난하거나 못 배웠거나 촌스럽다는 뜻으로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 유난히 많다.
Poor, broke, redneck, hillbilly, white trash, trailer trash, peasant....
비슷해 보이는데 하나씩 찾아보니 전혀 같은 말이 아니었다.
"가난하다" Poor는 그냥 돈이 없다는 뜻에 가깝다.
Low-income은 훨씬 사무적이다. 못산다는 저소득 가정을 이야기할 때 low-income household라고 하면 별다른 감정이 들어 있지 않다.
Broke는 또 다르다. "I'm broke"라고 하면 꼭 가난한 집안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번 달 카드값 내고 나니 돈이 없다거나, 지금 쓸 현금이 없다는 지금 당장 돈 없다 상태에도 얼마든지 쓴다.
연봉 30만불 넘는 높은 사람도 월요일 아침에 "I'm broke"라고 농담할 수 있다. 1년에 2백만 달러 버는 연예인도 "I'm broke" 라고 할수 있는것처럼.
직장을 잃고 돈도 떨어지고 사정이 꼬여 힘들게 지내는 안타까운 사연이 묻어나는 말에 가깝다.
그런데 Working class는 노동계층이라는 뜻이지 못사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Blue-collar 역시 마찬가지다. LA에서도 전기 기술자나 배관공, 건설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 수입을 들어보면 웬만한 사무직보다 훨씬 잘 버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blue-collar를 poor 대신 쓰면 말 자체가 틀어진다.
내가 가장 헷갈렸던 건 redneck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글을 보다 보면 가끔 미국의 가난한 시골 백인 정도로 설명되는데, 실제 뉘앙스는 훨씬 복잡하다.
돈보다는 미국 남부나 시골, 픽업트럭, 사냥, 낚시, 컨트리 문화 같은 이미지가 붙어 있다.
돈 많은 사람도 스스로 "I'm a redneck"이라고 농담한다.
문제는 본인이 자기 입으로 하는 것과 남이 그렇게 부르는 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Hillbilly도 비슷하다. 산골이나 시골 사람을 촌스럽게 표현하는 느낌이 강하고, 특히 애팔래치아 지역에 대한 고정관념과 연결된다.
친한 사람끼리 농담할 때와 생판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white trash, trailer trash까지 가면 굳이 실전 영어로 배워서 사용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하다는 것뿐 아니라 교양 없고 수준 낮은 사람이라는 판단까지 한꺼번에 집어넣는 상당히 모욕적인 표현이다.

Peasant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농민이나 소작농을 뜻하는 역사적인 단어다. 중세 유럽을 다룬 책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2026년 LA에서 멀쩡한 사람을 peasant라고 부르면 농업 종사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천한 것아", "평민 주제에" 같은 과장된 조롱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아기 옷에 적힌 "READ TO ME, YOU PEASANT"가 웃긴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엄마 아빠를 하인처럼 부리면서 "책 읽어라, 이 평민아" 하는 설정이다.
미국에 15년 살면서 느낀 건 영어를 잘한다는 게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것과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쉬운 단어 하나를 어느 자리에서 꺼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영어를 잘한다.
가난한 가정을 말해야 한다면 low-income family라고 하면 된다.
평범하게 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면 working-class 나 ordinary working people 정도가 자연스럽다.
당장 돈이 떨어졌다면 broke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redneck, hillbilly, peasant 같은 단어부터 꺼내면 거기에는 소득 이외의 판단이 따라붙는다. White trash나 trailer trash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말도 그렇다는 것이다.
"서민", "빈곤층", "가난한 사람", "촌사람", "상것"은 사전에서 어느 정도 연결될 수 있어도 사람 앞에서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영어도 똑같았다.
결국 미국에서 오래 살수록 새로 배우게 되는 것은 단어의 뜻보다 단어의 분위기인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단어들은 많이 알아두는 건 좋다. 영어도 훨씬 잘 들리고 미국 사람들이 농담하는 것도 이해하기 쉬워진다.
특히 남의 집안이나 계층을 이야기할 때는 말 한마디 잘 골라 쓰는 사람이 영어도 훨씬 교양 있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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