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 보면 재미있는게 대부분 이메일에서는 친절한 사람들처럼 행동한다는 겁니다.
"Hope you're doing well."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하루에도 몇 통씩 받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내용을 읽어보면 전혀 잘 지내길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ㅋㅋ
지난주에 보낸 자료는 왜 아직 검토하지 않았는지, 누가 승인했는지, 왜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지 따박따박 혈압 오르게 따지고 있습니다.
말투만 부드러울 뿐 사실상 시비를 거는 겁니다.
특히 미국 회사에서 자주 사용하는 "Just following up"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냥 확인차 연락한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내가 이전에 이메일 보냈는데 왜 너는 답장이 없냐?"에 가깝습니다.
여기에 "Gentle reminder"까지 등장하면 상황이 조금 심각해집니다.
친절한 알림이라고 하지만 전혀 친절하지 않습니다.
이미 상대방은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이메일을 받는 사람도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Thank you for your patience."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냅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처리하지 않았고 언제 처리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미국 회사에서 이메일은 업무를 처리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하는 헬스케어 업계는 특히 그렇습니다.
보험, 청구, 환자 관련 행정업무, 내부 승인 등 여러 부서가 얽혀 있다 보니 문제가 생기면 서로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증명하려고 합니다.
누군가 이메일에 "As previously discussed"라고 적었다면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얘기했잖아. 이제 와서 딴소리하지 마."
여기에 "For your reference"라면서 지난달 이메일을 첨부하면 본격적인 증거 제출이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이메일은 업무 연락이 아니라 법정 공방에 가까워집니다.
가장 재미있는 사람들은 CC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싸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누가 책임을 떠넘기는지, 누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지 전부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치 권투 경기 관중 같습니다.
링 위에서는 두 사람이 정중한 문장으로 서로 주먹을 날리고 있는데, 관중석에서는 팝콘 먹으면서 구경하는 분위기입니다.
가끔 매니저가 CC에 추가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건 심판이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심판도 대부분 판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Let's schedule a meeting to discuss."
회의를 잡자는 겁니다. 결국 이메일로 30분 동안 싸우다가 회의실에서 한 시간을 더 싸웁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면 또 이메일이 옵니다.
"Thank you everyone for the productive discussion."
생산적인 논의에 감사한다는데 정작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다음 주에 다시 회의를 잡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국 회사의 업무 문화가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것을 피하는 대신, 정중한 문장 속에 불만과 비난을 아주 정교하게 숨겨 놓습니다.
물론 모든 이메일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같은 문장이라도 누가 보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미국 직장인 이메일 표현의 진짜 의미는 이렇습니다.

직장인 이메일 번역 사전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 = 내가 한 짓이 아니다.
"말씀해 주셨던 부분" = 니들이 하라고 했던 거.
"~라고 하셨는데" = 말 바꾼 거 다 안다.
"언제 확인 가능하신지" = 뭐 하느라 쳐 늦으시는지.
"보내드렸었는데" = 잊어버린 너 때문.
"내부 협의를 거치고" = 뒷담화를 하겠다.
"저희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 저리 꺼져라.
"그날 뵙겠습니다" = 회의실에서 누가이기나 끝장을 내 보자
그리고 미국 회사에서 가장 무서운 문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Per my last email."
지난번 이메일에서도 말씀드렸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제 귀에는 이렇게 들립니다.
"야, 내가 쓴 이메일 좀 읽어라."
오늘도 출근해서 이메일을 열어 봅니다.
받은 편지함에는 정중한 인사와 감사의 표현이 가득합니다.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아름다운 직장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아침부터 이미 세 군데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커피 한 잔 마시고 답장을 씁니다.
"Thank you for bringing this to my attention."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아침부터 아주 지랄을 하시는군요."
물론 Send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CC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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