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온 대답은 "Let me check my schedule"이었다.
말 그대로 번역하면 일정을 확인해보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정말 스케줄을 확인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서는 결국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고 주말도 그냥 지나갔다.
그제야 나는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Yes"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이런 게 좀 헷갈렸다.
못 갈 것 같으면 그냥 못 간다고 하면 되지, 왜 스케줄을 알아본다고 했을까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인이라고 언제나 직설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부탁이나 초대를 거절하는 순간에는 상대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이유를 대거나 여지를 남기거나 긍정적인 말을 먼저 붙이는 경우가 꽤 많다.
이게 재밌는 건 미국이 원래 돌려 말하는 문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분류에 따르면, 미국은 말 자체에 분명한 의미를 담아 전달하는 대표적인 '저맥락 직설 문화'다.
맥락과 눈치, 분위기로 속뜻을 전하는 한국이나 일본 같은 '고맥락 문화'와는 전혀 다른 편에 서 있다.
하지만 그토록 직설적인 미국인들조차 유독 '거절'의 순간만큼은 말을 한참 돌려서 말하는 방식이 많다.
말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화라 생각했던 동네에서, 거절 뒤에 숨겨진 진짜 맥락을 읽어야 한다니 좀 웃기지 않은가?
내가 지난 몇 년 여기서 빵을 굽고 카페를 전전하며 몸으로 익힌 목록을 꺼내보면 이렇다.
"I'll think about it", 생각해보겠다는 말은 열에 아홉 다시 연락이 안 온다.
"Let me get back to you"도 비슷해서, 날짜를 못 박지 않은 답장은 사실상 답이 정해진 경우가 많다.
"We'll circle back on this"나 "Let's touch base soon"
역시 이메일에서 자주 보이는데, 구체적인 다음 일정이 없으면 그냥 여기서 끝이라는 뜻으로 읽으면 대체로 맞는다.
바쁘다는 표현도 단골이다. "I'm swamped these days", "I've got a lot on my plate"라고 하면 지금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완곡한 신호다.
"Maybe next time", "Let's see how it goes", "I'll try my best"도 마찬가지로 여지를 남기는 척하면서 문을 슬쩍 닫는 말들이다.
"That's an interesting idea though"라는 감탄사 뒤에 구체적인 동의가 안 붙으면 그것도 거절, "I'll sleep on it"도 대개 다음날 답은 없다.
"No worries, but..." 뒤에 이어지는 문장이 진짜 용건이고, "Sounds good!"이라고 밝게 답했는데 후속 날짜를 안 잡으면 그 미소도 예의상 인사에 가깝다.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는 이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계속 기다리는 쪽이었다.
동네 빵집 사장님한테 파트타임 자리를 물어봤을 때도 "We'll keep your resume on file"이라는 답을 들었는데, 그게 정중한 거절의 정석 문구라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
학교나 회사에서도 "It's not really in the budget right now"나 "Let's revisit this down the line" 같은 문장이 자주 쓰이는데, 결국 예산이나 시기 탓으로 돌리면서 상대 체면을 지켜주는 방식이다.
결국 이런 화법은 무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예의를 지키려는 쪽에 가깝다.
한인 커뮤니티 모임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자주 듣는다.
미국인 동료가 "let's grab coffee sometime"이라고 해서 진짜 커피 약속인 줄 알고 날짜를 물었다가 어색해졌다는 사연 같은 것들.
이게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상대의 기분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의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훨씬 편해진다.
빵 반죽도 억지로 잡아 늘이면 찢어지지만 시간을 주고 가만히 두면 스스로 부풀어 오른다.
사람 마음도 비슷해서, 답을 재촉하기보다 발효되듯 기다려주는 편이 결국 서로에게 덜 상처가 된다.
거절을 거절이라 부르지 않는 문화를 옳고 그름으로 가를 일은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언제 밥한번 먹자, 술한잔 합시다" 하면서 연락 없는게 국룰이라고 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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