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을 때는 액션 많고 재미있게 사건이 끊임없이 터지는 영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나니 천천히 빌드업 하면서 재미있게 풀리는 영화에 더 눈길이 간다. 그런 의미에서 1989년작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는 지금 다시 봐도 재미보다는 특이한 영화다.
요즘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 첫 만남부터 강렬하고, 갈등도 빠르고, 사랑도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해리와 샐리는 대학 졸업 후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어색한 여행으로 처음 만난다. 그리고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흘려보낸다. 친구로 만나고, 멀어지고, 다시 만나고, 서로의 연애를 지켜보며 조금씩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젊을 때는 운명적인 만남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보니 사람은 한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오랜 시간 옆에 있는 사람의 가치를 나중에 깨닫는 경우가 더 많다. 해리와 샐리의 관계도 그렇다.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기까지 10년이 걸린다.
영화 속 뉴욕도 참 아름답게 나온다. 사실 거의 40년전이라 지금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센트럴 파크에 낙엽이 가득 쌓인 가을 풍경, 그리니치 빌리지의 조용한 거리, 서점과 카페가 늘어선 골목길은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보는 느낌을 준다.
특히 센트럴 파크를 걸으며 대화하는 장면들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화려한 특수효과도 없고 자극적인 장면도 없지만 사람 냄새가 난다. 지금 시대 영화에서는 오히려 보기 어려운 여유다. 진짜 영화가 아니면 이때 이 분위기를 어떻게 후세에게 남길수 있나 싶다.
빌리 크리스탈은 지금 보면 화려한 미남 배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특유의 유머와 현실적인 매력으로 해리라는 캐릭터를 완성한다. 멕 라이언 역시 1990년대 로맨틱 코미디 여왕이 되기 직전의 가장 빛나던 시절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스럽지만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은 샐리는 지금 봐도 매력적이다.

멕 라이언이 보여준 그 유명한 가짜 오르가즘 연기는 지금도 미국 영화사 최고의 코미디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장면보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평범한 대화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단순한 질문 같지만 영화는 두 시간 내내 그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다. 그리고 보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사랑을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로움, 실패한 연애, 결혼에 대한 두려움, 혼자 남겨질 것 같은 불안함은 나이가 들어도 똑같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흥행 성적도 대단했다. 제작비 약 1,600만 달러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북미에서 9,2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집계된 해외 수익까지 포함하면 전 세계 흥행 수입은 약 1억 9천만 달러에 이른다. 1989년 기준으로는 엄청난 흥행 기록이었다. 한국에서도 당시 서울 관객 약 35만 명을 동원하며 연간 흥행 순위 상위권에 올랔다.
또한 노라 에프론의 각본은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후보에 올랐고,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100대 코미디 영화에서 23위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까지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58세가 된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며 느낀 건 단순하다. 젊을 때는 "언제 둘이 사귀게 될까"를 보게 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는 "인생에서 끝까지 남는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보게 된다. 그래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단순한 연애 영화가 아니라 시간과 우정, 그리고 인연에 관한 영화로 남는다.
어쩌면 이 영화가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사랑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으니까.
나처럼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선 사람들이 본다면 젊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동을 받게 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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