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너하임이라고 하면 다들 디즈니랜드부터 떠올립니다. 저도 손님이 오면 으레 그쪽으로 차를 몰았지요.
그런데 이 도시 이름의 뜻을 아는 분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알고 나면 동네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Anaheim은 산타아나 강의 Ana에 독일어로 집을 뜻하는 heim을 붙인 이름입니다. 풀어 쓰면 산타아나 강가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스페인어와 독일어가 한 단어 안에 섞인 셈입니다. 이 이름이 이 마을의 시작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1857년,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독일계 이민자들이 Los Angeles Vineyard Society라는 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주주는 50명이었습니다.
목표는 단순했습니다. 남가주에 땅을 사서 포도를 심고 와인을 만들어 팔자는 것이었습니다.
측량 기사 George Hansen이 땅을 골랐고, 조합은 1,165에이커를 에이커당 2달러에 사들였습니다. 지금 애너하임 집값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숫자입니다.
땅은 20에이커짜리 포도밭 50필지와 집터 50필지로 나눴습니다. 주주 한 명당 포도밭 하나, 집터 하나가 돌아가는 구조였습니다. 학교와 공공건물을 지을 땅도 따로 떼어뒀습니다.
필지 배정은 추첨으로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누가 좋은 땅을 차지하느냐로 싸울 여지를 처음부터 없앤 겁니다.
흥미로운 건 이 사람들 상당수가 농사꾼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목수, 대장장이, 음악가 같은 도시 사람들이 돈을 모아 농장을 산 것이지요.
조합을 이끈 John Frohling과 Charles Kohler도 원래 음악가 출신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와인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도 농사 경험자는 거의 없었다는 게 여러 기록의 공통된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주민들이 오기 전에 미리 일꾼을 써서 포도나무를 심고 수로를 팠습니다. 산타아나 강물을 끌어오는 본 수로만 7마일 가까이 됐다고 합니다.
마을 둘레에는 버드나무 말뚝 4만 개로 울타리를 쳤습니다. 소 떼가 포도밭을 짓밟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버드나무 울타리에 문을 냈던 자리가 지금도 Gates of Anaheim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그 자리를 기념하는 표지가 서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실제로 땅을 넘겨받은 건 1859년 말부터였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하나둘 내려와 정착했습니다.
그 뒤로 애너하임은 20년 넘게 캘리포니아에서 손꼽히는 와인 산지였습니다. 1884년 한 해에 와인 125만 갤런, 브랜디 10만 갤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도시로 법인화한 건 1870년입니다. 오렌지카운티가 생기기도 전, 아직 LA카운티 땅이던 시절 얘기입니다.
그런데 1880년대 중반, 이름 모를 병이 포도나무를 말려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잎이 타들어가고 나무가 몇 년 안에 죽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병을 Anaheim disease라고 불렀습니다. 마을 이름이 병 이름이 된 겁니다.
병의 정체를 몰랐으니 손쓸 방법도 없었습니다. 포도밭을 다시 심어봐도 같은 병이 또 돌았다고 합니다. 30년 가까이 쌓아온 산업이 몇 년 만에 무너진 겁니다.
1931년에 나온 지역사 기록은 5년 안에 포도나무 200만 그루가 사라졌다고 적고 있습니다. 1891년에 애너하임에 남은 포도밭은 14에이커뿐이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병은 나중에 연구자 Newton Pierce의 이름을 따 Pierce's disease로 바뀌었습니다. 세균이 원인이라는 게 확실히 밝혀진 건 거의 한 세기 뒤였습니다.
지금도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들이 이 병 때문에 골치를 앓습니다. 애너하임은 그 첫 번째 피해자였던 셈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죽은 포도밭을 갈아엎고 오렌지와 호두를 심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누가 보상해주길 기다린 게 아니라 자기 돈으로 산 땅에서 다음 작물을 찾아낸 겁니다.
애너하임 일대의 과수원은 그 뒤로 반세기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55년, 오렌지와 호두 과수원이던 땅에 디즈니랜드가 문을 열었습니다.
포도밭에서 오렌지밭으로, 오렌지밭에서 놀이공원으로 바뀐 겁니다. 땅은 그대로인데 그 위에서 먹고사는 방법만 두 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으신다면, 다음에 디즈니 가는 길에 한 시간만 따로 빼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Founders Park에 George Hansen이 1857년에 지은 Mother Colony House가 남아 있습니다.
공개 일정은 바뀔 수 있으니 가기 전에 애너하임 시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는 게 좋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가면 미키마우스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지도 모릅니다.
낯선 땅에 온 이민자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일군 마을이라는 점에서 우리 한인들 얘기와도 닮았습니다. 저는 그 고집스러운 개척 정신이 이 도시의 진짜 뿌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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