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미국인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종이 한 장을 보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아이들 이름 옆으로 설거지, 빨래 개기, 마당 쓸기, 강아지 산책 같은 항목이 나란히 적혀 있고, 그 옆에는 각각 얼마씩 받는지 금액까지 아주 꼼꼼하게 써 있었다. 마치 회사 급여표를 축소해놓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체크 표시가 없으면 그 주는 용돈도 없다는 규칙이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붙어 있었는데, 그 단호함이 묘하게 인상 깊었다.
한국에서 자란 나에게 용돈이란 그냥 부모님이 알아서 챙겨주시는, 조건 없는 사랑의 표현에 가까운 것이었다.
성적이 오르면 보너스처럼 얹어주는 정도는 봤어도, 집안일 하나하나에 가격표를 매기는 건 낯선 풍경이었다. 심부름 몇 번에 얼마, 이런 계산은 우리 집에서는 상상도 못 해본 방식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게 몇몇 집만의 별난 방식이 아니라 꽤 보편적인 문화라는 걸 알고 나서 더 놀랐다.
여름이면 동네 십대 아이들이 이웃집 잔디를 깎아주고 용돈을 벌고, 마당 한켠에서 레모네이드를 팔아 첫 사업을 시작해보는 모습도 미국에서는 흔한 여름 풍경이다.
더 어린 아이들은 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는 대신, 일한 만큼 용돈 봉투를 채워가는 방식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숫자로 확인해보고 싶어져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인 조사가 많더라고요.
해리스폴이 미국공인회계사협회를 위해 진행한 설문을 보면, 응답자의 52퍼센트가 용돈은 집안일과 완전히 연결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냥 매달 정해진 날 주는 게 아니라, 일한 만큼 정산해주는 방식을 절반 이상이 지지한다는 뜻이다.
아이는 마땅히 어떤 형태로든 용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86퍼센트나 됐다.
같은 조사에서 아이들이 받는 주간 용돈은 평균 30달러였고, 그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집안일은 일주일에 평균 5.1시간이었다.
다른 조사기관인 티로프라이스의 설문에서도 흐름은 비슷했다.
부모의 79퍼센트가 아이에게 용돈을 주고 있었고, 그중 64퍼센트는 반드시 일을 해야만 받을 수 있게 정해두고 있었다.
두 조사기관이 따로 물었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겹치는 걸 보니, 이건 그냥 몇몇 집의 개인 취향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깔린 문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일과 돈을 딱 붙여서 가르치는 걸까, 궁금증이 생겼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답은 생각보다 오래된 곳에 있었다.
18세기 농경 사회였던 미국에서는 다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도 농장 일손을 거들어야 했다. 씨 뿌리기, 가축 돌보기, 물 긷기처럼 몸을 써야 하는 일이 나이와 상관없이 온 가족의 몫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시절 아이의 노동은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몫이었지, 따로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며 산업화되고 가정의 형태가 도시형으로 바뀌면서, 그 노동의 자리를 용돈이라는 새로운 교육 도구가 대신하게 된 셈이다. 몸으로 부딪히던 생존의 기술이 이제는 돈의 개념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옮겨간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이 방식에 모두가 찬성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 론 리버는 용돈이 임금이 아니라 가르침의 도구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리학자 웬디 모겔 역시 집안일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몫이지, 돈으로 사고파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설거지를 했다고 매번 돈을 받으면, 정작 가족이라서 서로 돕는다는 감각은 옅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반대편에서는 어릴 때부터 노동과 보상의 관계를 몸으로 익힌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기 쉽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양쪽 다 나름의 근거가 있어서,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미국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자립을 중요한 미덕으로 여기는지 새삼 느꼈다. 부모가 언제까지나 대신 챙겨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이렇게 어릴 때부터 은근하게 알려주는 셈이니까.
어린 나이부터 내가 움직인 만큼 손에 쥐는 게 있다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심어주는 방식이니까.
다만 모든 집이 이런 여유를 가진 건 아니라는 점도 함께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형편이 빠듯한 가정에서는 아이의 노동이 교육이 아니라 생계의 일부가 되어버리기도 하니, 이 방식이 늘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좋은 취지도 형편에 따라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이 문화에서 배울 점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대가 없이 받는 것에 익숙해지기보다,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해내고 그 결과를 손에 쥐어보는 경험이 아이에게는 꽤 단단한 자산이 될 것 같다. 그 자산은 용돈 액수보다 훨씬 오래 남을 것이다.
냉장고 문에 붙어 있던 종이 한 장이, 사실은 한 사회가 아이를 어떤 어른으로 키우고 싶어하는지 보여주는 작은 지도였던 셈이다.

Sunny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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