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우리는 게임 속에서 진짜로 살았다 - Los Angeles - 1

지금 생각해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World of Warcraft)를 처음 봤을 때 충격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전에도 RPG는 리니지도 했고 디아블로도 했고 국내에서 서비스하던 이런저런 온라인 RPG도 기웃거렸다.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물약 사고, 사냥터 나가서 몬스터 잡고, 레벨 올리고 장비 하나 먹으면 좋아서 친구한테 자랑하고.

그런데 2004년 한국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들어왔다.

느낌이 그동안 자그마한 연못에서 "야, 세상 넓다" 이러고 있었는데 누가 갑자기 바이칼 호수 한가운데 데려다 놓은 기분이었다.

뭐야 이거.

마을 하나 지나갔더니 또 마을이 나오고, 산을 넘어갔더니 새로운 지역이 나오고 거기서 또 퀘스트가 시작된다.

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갈 수도 있다.

심지어 지나가다가 보이는 산도 그냥 배경 그림이 아니라 진짜 올라갈 수 있는 산이었다.

요즘 게임만 해본 사람들은 이게 뭐가 대단하냐고 할 수 있는데 2004년에는 달랐다.

정말 하나의 세계를 컴퓨터 안에 집어넣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나는 언데드 초반 지역을 아직도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우리는 게임 속에서 진짜로 살았다 - Los Angeles - 2

관에서 깨어나 데스넬을 돌아다니는데 분위기가 정말 희한했다.

하늘은 칙칙하고 나무는 비틀어져 있고 주변에는 묘지가 널려 있다.

그런데 퀘스트를 하나씩 하다 보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언데드들이 어떤 처지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그전까지 퀘스트라는 건 사실 "늑대 10마리 잡아오세요" 정도로 생각했는데 WoW는 그 늑대 10마리를 잡는 데도 이유를 붙여놨다.

퀘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 마을로 가고, 거기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그러다 정신 차려보면 내가 이 세계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게 너무 신기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 시절 학생에게 정액제 온라인게임은 부담스러웠다.

지금처럼 무료 게임에 배틀패스 사고 스킨 사는 시대가 아니라 매달 돈을 내야 계속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그 서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WoW의 충격만 머릿속에 남겨놓고 있다가 2007년 불타는 성전이 나오면서 결국 제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웃랜드의 다크 포탈을 처음 넘어갔을 때도 기억난다. 하늘부터 미쳐 있었다.

붉은 땅에 이상한 생물들이 돌아다니고 저 멀리 지옥절단기가 쿵쿵 걸어오는데 "아, 블리자드 이놈들이 또 일을 벌였구나" 싶었다.

그때부터는 게임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학교 갔다 와서 접속하면 길드 형들이 있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우리는 게임 속에서 진짜로 살았다 - Los Angeles - 3

얼굴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매일 같이 던전 돌고, 전멸하면 서로 욕하고 웃고, 아이템 하나 나오면 주사위 굴리면서 난리를 쳤다.

새벽 두 시까지 레이드하다가 다음 날 학교에서 졸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더 신기한 일도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인데 게임에서 알게 된 길드 형, 누나가 진짜 결혼을 했다. 그런데 나를 결혼식에 초대했다.

게임 속에서 갑옷 입고 뛰어다니던 사람들이 양복 입고 드레스 입고 서 있으니까 얼마나 이상하던지.

가서 밥도 얻어먹었다.

온라인게임에서 만난 고등학생 꼬맹이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에 불러 밥까지 먹여준 거다.

요즘 WoW 그래픽을 보면 세월이 느껴진다. 더 크고 화려하고 예쁜 게임도 수도 없이 나왔다.

그런데 그때의 충격은 다시 만들기 어렵다.

WoW가 대단했던 건 맵이 커서만도 아니고 레이드가 재미있어서만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게임 안에 세상이 있다는 느낌을 줬다.

그리고 그 세상 안에서 진짜 사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