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 워싱턴 D.C.의 젖줄 포토맥 강변에 자리 잡은 '존 F. 케네디 공연예술센터(이하 케네디센터)'는 단순한 극장이 아니다.
1963년 암살당한 비운의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연방 의회가 법을 만들고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이 서명해 세운, 미국 자유주의와 문화적 자존심의 성역이다.
그런 이곳의 건물 외벽에서 밤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이 법원명령으로 철거되는 블랙코미디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현재 미국 정치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쪼개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케네디센터 앞에는 수백 명의 시민이 모여들었고, 크레인에 올라탄 작업자들이 외벽의 글자를 하나씩 떼어낼 때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모습은 인터넷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됐다. 국가적 문화예술의 산실이 졸지에 정치적 청산의 현장으로 변질된 이 사태를 보며 많은 이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로 트럼프 취임 직후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임명했던 이사회 인사 18명을 무더기로 경질하는 전례 없는 '물갈이'를 단행했다.
전통적으로 케네디센터 이사회는 여야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나, 트럼프에게 그런 관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스스로 이사회 의장 자리에 앉은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은 곧바로 케네디 전 대통령의 이름 앞에 '트럼프'를 추가하는 개명안을 의결했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닌, 미국 진보 진영의 가장 상징적인 아이콘인 '케네디'의 유산에 트럼프라는 낙인을 찍겠다는 고도의 정치적 도발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른바 '문화전쟁(Culture War)'의 일환이다. 진보적 색채가 짙은 예술·문화계의 중심부에 자신의 깃발을 꽂음으로써 보수 지지층에게 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민주당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연방하원 의원을 앞세워 즉각 소송을 제기했고 사법부는 민주당의 손을 들어줬다.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의 크리스토퍼 쿠퍼 판사는 "케네디센터의 명칭을 변경할 권한은 오직 의회에만 있다"며 행정부의 월권을 매섭게 질타했다. 이사회가 "단순한 별칭일 뿐"이라고 변명하며 철거 시한 직전까지 항소로 버텼지만 법원은 단칼에 기각했다.
이번 판결은 민주당에 단비 같은 정치적 승리다. 민주당은 트럼프의 독주를 저지하고 국가적 유산을 지켜냈다는 명분을 얻었다.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사유화하려는 트럼프식 권위주의에 사법부가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는 것이 민주당의 입장이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반발했다. 그는 "쿠퍼 판사와 급진 좌파들이 센터를 발전시키기보다 차라리 망하기를 바라고 있다"며 특유의 '낙인찍기' 프레임으로 사법부와 민주당을 동시에 비난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 민심은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다. 워싱턴 D.C. 현장에서 철거를 지켜보며 환호한 이들은 주로 반트럼프 성향의 시민들이었다.
이들에게 이번 철거는 공공 자산을 사유화하려던 독재적 시도를 막아낸 '정의의 구현'이다.
그러나 워싱턴 외곽의 이른바 '트럼프 카운티'라 불리는 교외와 농촌 지역의 민심은 전혀 다르다. 보수 지지층은 이번 사건을 기득권 워싱턴 정가(엘리트 집단)와 민주당, 그리고 편향된 사법부가 합작해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을 모욕한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예술계와 사법부마저 좌파들이 장악했다"는 트럼프의 주장에 동조하며 결집력을 더 다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결국 건물 외벽의 글자는 지워졌지만 깊어질 대로 깊어진 미국의 분열만 뉴스로 보도되고 있다.
국가적 상징물을 두고 벌이는 유치한 이름 전쟁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들의 피로감만 깊어지고 있다고 본다.


vibecoasttraveler1982
행복은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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