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예보에 빵과 우유부터 동나는 미국 마트의 미스터리 - Billings - 1

지난주 저녁에 일기예보를 보니 눈이 온다고 합니다.

얼마나 오려나 싶어 확인했더니 제법 쌓일 수도 있다는 예보였습니다.

마침 우유도 떨어졌겠다, 마트에 잠깐 들렀습니다.

그런데 우유 냉장고 앞에 가보니 거의 텅 비어 있습니다.

식빵 코너는 더 심합니다. 평소에 잘 팔리지도 않는 통밀빵 몇 개만 남아 있고, 계란도 대부분 동났습니다.

웃긴 건 바로 옆에 있는 통조림 수프나 쌀은 그대로 쌓여 있다는 겁니다.

아니, 눈이 많이 와서 며칠 동안 집에 갇힐지도 모른다면서 왜 하필 우유와 계란부터 사는 걸까요?

미국에 오래 사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눈 예보만 나오면 사람들이 빵, 우유, 계란부터 사들이는 현상 말입니다.

이게 미국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보스턴에는 아예 'French Toast Alert System'이라는 농담 섞인 폭설 경보까지 있습니다.

지역 뉴스 사이트 유니버설 허브의 운영자 애덤 개핀이 2007년 무렵 만든 것인데, 눈이 얼마나 심하게 올지를 프렌치토스트 조각 수로 표시합니다.

한 조각이면 별일 없고, 다섯 조각이면 상당한 폭설이 예상된다는 뜻입니다.

왜 프렌치토스트냐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 사람들이 눈 온다고 사재기하는 물건이 빵, 우유, 계란입니다. 이 세 가지를 섞으면 프렌치토스트가 됩니다.

누가 처음 생각했는지 참 기발합니다.

그런데 이 습관이 언제 시작됐는지 알아보니 1978년 뉴잉글랜드 대폭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보스턴을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엄청난 눈이 내렸습니다.

도로가 마비되고 차량들이 눈 속에 갇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며칠 동안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기상정보 회사 아큐웨더는 이런 대형 폭설의 경험이 미국인들의 식료품 사재기 습관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1978년 폭설이 이 습관의 정확한 시작이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전에도 눈이 온다고 하면 사람들은 먹을 것을 미리 사뒀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왜 쌀이나 통조림이 아니라 우유와 빵, 계란일까요?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 가정에서 빵과 우유, 계란은 가장 기본적인 식료품입니다. 아침에 토스트를 먹고, 계란을 부쳐 먹고, 시리얼에 우유를 붓습니다.

눈이 와서 밖에 못 나가더라도 평소 먹던 아침 식사는 그대로 먹고 싶은 겁니다.

또 하나는 마트의 재고 문제입니다.

통조림은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지만 우유와 빵은 유통기한이 짧습니다. 마트에서도 필요한 만큼 자주 공급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평소보다 손님이 조금만 몰려도 진열대가 금방 비어버립니다.

그런데 진짜 재미있는 건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우유만 사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계란이 거의 다 팔린 걸 보니 괜히 불안해졌습니다.

'어? 계란도 사야 하나?'

집 냉장고에 계란이 남아 있는데도 말입니다. 남들이 다 사니까 나도 사야 할 것 같은 겁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군중 행동이나 사회적 영향으로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특정 물건을 집중적으로 구매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그 물건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기 쉬워집니다.

결국 눈이 무서워서 사는 건지, 다른 사람들이 사니까 따라 사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제가 사는 지역은 한 시즌에 100인치가 넘는 눈이 내린 기록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눈이 특별한 재난이라기보다 겨울마다 찾아오는 손님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눈 예보만 나오면 마트의 우유와 빵이 사라집니다.

수십 년 동안 눈을 겪어온 사람들이 매번 처음 폭설을 맞는 사람들처럼 장을 보는 겁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눈 예보가 나오면 가장 바빠지는 사람은 제설차 운전사가 아니라 마트 우유 납품업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