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동네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다가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한 명씩 앞에 나가서 뭔가를 들고 발표하는 모습을 봤다. 손에는 장난감 로봇 하나, 표정은 잔뜩 상기돼 있고, 반 친구들은 진지하게 듣고 있더라. 그 흔한 쇼 앤 텔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자랐다면 저 장면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발표라고 하면 보통 시험이나 숙제 검사에 가까웠지 저렇게 대놓고 내 물건, 내 이야기를 자랑하듯 풀어놓는 시간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런데 미국에서는 저게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서 초중고, 대학, 회사까지 쭉 이어진다. 이력서 한 줄, 면접 답변 하나에도 결국 이야기가 필요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스토리에 진심일까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봤다.
쇼 앤 텔의 뿌리를 찾아보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 같은 형태로 자리 잡은 건 1950년대 미국 초등교육 현장에서였다고 한다. 아이들의 언어 표현력을 키우고 자신감을 길러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활동이 그대로 교실 문화로 굳어진 거다. 즉 처음부터 목적이 분명했다. 정답을 맞히는 게 아니라 내가 겪은 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 앞에서 조리 있게 말하는 연습이었던 셈.
이게 어른이 되면 프레젠테이션 문화로 그대로 이어진다. 회사 미팅에서도 숫자만 나열하면 다들 딴생각하기 바쁜데, 반대로 짧은 에피소드 하나로 시작하면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걸 여러 번 겪어봤다. 실제로 TED 강연 문화를 봐도 그렇다. TED는 1984년 리처드 솔 워먼이 시작한 컨퍼런스인데, 지금까지 나온 명강연들을 뜯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로 문을 연다. 정보 전달보다 이야기 전달이 먼저인 셈이다. 발표 잘하는 사람들 강연을 유심히 보면 슬라이드보다 첫 문장에 훨씬 공을 들인다는 것도 눈에 띈다.
왜 미국 사회는 이렇게까지 개인의 서사를 중요하게 여길까 생각해보면,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 나라는 원래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라 서로의 맥락을 미리 알고 시작하는 관계가 별로 없다. 학벌이나 출신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고,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직접 말해야 상대가 비로소 나를 파악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소개서 한 줄도, 면접 답변 한 마디도, 심지어 동네 커피숍에서 나누는 스몰토크마저 결국 짧은 스토리 형식을 갖추게 되는 거다. 사실을 나열하는 것보다 맥락을 붙여 설명하는 쪽이 훨씬 빨리 신뢰를 만든다.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도 이 부분은 세대마다 온도차가 꽤 크다. 부모님 세대는 겸손이 미덕이라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걸 낯간지러워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여기서 나고 자란 세대는 자기 서사를 다듬는 데 훨씬 익숙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발표와 에세이로 단련이 됐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같은 자리에서도 서로 다른 화법으로 이야기하고, 가끔은 그 온도차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어느 쪽이 맞다 틀리다의 문제는 아니고, 각자 다른 환경에서 다른 생존 방식을 익힌 거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텔링 문화가 과장되면 피곤해지기도 하지만, 잘 쓰면 꽤 쓸모 있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숫자나 이력만으로는 안 보이는 것들이 이야기 안에는 담기니까. 결국 발표든 자기소개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사실 나열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장면 하나더라. 나도 오늘부터 회의 시작할 때 숫자보다 장면 하나 먼저 꺼내볼까 싶다. 완벽한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진짜 내 이야기 한 조각이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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