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히려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나름 얼리어답터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고, 프랑스의 새로운 십진법 기반 측정 체계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제퍼슨은 같은 십진법 기반 시스템 애호가 도지에라는 인물이 의회를 설득해 미국이 미터법을 채택하도록 도와주기를 희망했습니다.
미국 건국당시 미국은 측정 단위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습니다. 뉴욕에서는 네덜란드식 체계를, 뉴잉글랜드에서는 영국식 체계를 사용하고 있어서 주마다 이루어지는 상거래가 거의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제퍼슨은 이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미터법을 손에 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793년, 프랑스에 "기준이 되는 추(grave)랑 미터 막대 좀 보내봐 봐" 하고 요청했습니다.
프랑스는 흔쾌히 응했고, Joseph Dombey라는 저명한 식물학자 겸 과학자에게 임무를 맡겨 귀한 표준 기물들을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정확히 1미터 길이의 막대 하나와 정확히 1킬로그램 무게의 "그라브(grave)"라 불리는 구리 원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던 도지에의 배가 카리브해에서 거센 폭풍을 만나 항로를 한참 벗어나 표류하게 되었고, 손상되고 방향을 잃은 배는 결국 영국 사략선(privateers, 정부 공인 해적)에게 나포되고 말았습니다. 도지에는 영국령 몬세라트섬으로 끌려가 포로 상태에서 사망했고, 그가 가져오던 표준 기물들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도지에가 가져온 킬로그램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제퍼슨은 의회를 움직일 물증이 없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통신은 혼란스러웠고, 행정부가 바뀌면서 우선순위도 달라졌습니다. 기회는 사라졌고, 영국이 20세기에 미터법으로 갈아탄 뒤에도 미국은 영국식 제국 단위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 "난 빠질게, 넌 고생해라.")
재미있는 후일담을 덧붙이자면, 도지에가 가져오려던 그 그라브로 추정되는 1793년산 표준 기물이 현재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때 해적의 보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이 물건이, 결국 미국 땅을 밟긴 했는데 200년이나 늦게 도착한 셈입니다.
"바꾸고 싶지? 천문학적인 전환 비용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슬슬 분위기가 바뀝니다. 미국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유럽 대부분이 미터법으로 전환을 마쳤습니다 — 자존심 센 영국만 빼고요. 미국도 1866년 미터법 사용을 합법화했고, 1975년에는 미터법을 "선호되는 무게와 측정의 체계"로 지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너무 늦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서 미국 전체를 바꾸는 건 '심시티' 게임에서 도시 전체를 불도저로 밀고 새로 짓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미국 전역에 깔린 수백만 개의 마일(mile) 표지판을 킬로미터(km)로 바꾸는 비용만 수십억 달러 규모입니다. 볼트, 너트, 나사 구멍 하나부터 거대한 항공기 제조 설비까지 전부 센티미터(cm) 단위로 새로 맞추려면 기업들이 줄도산할 위험이 있습니다. 수억 명의 국민에게 새 단위를 다시 가르쳐야 하는 사회적 비용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집니다.

1970년대에 지미 카터 대통령 정부 시기, 미국은 정말로 진지하게 미터법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1977년 연방고속도로국이 도로 표지판에 킬로미터를 표기하기 시작하겠다고 발표하자, 6,000통이 넘는 민원 편지가 쏟아졌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미터법을 "공산주의자의 음모"로 간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캔자스시티의 한 시민은 "이번 미터법 전환은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양동 작전의 일부"라고 적어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미터법은 단순한 측정 단위가 아니라 '외세의 침략' 그 자체였던 셈입니다. 결국 1982년 레이건 대통령이 미터위원회(U.S. Metric Board)에 대한 예산을 끊으면서 미터법 전환 노력은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위원회는 상무부 산하 미터프로그램국(Office of Metric Programs)으로 축소되었고, 예산은 이전의 5분의 1 미만으로 깎였습니다.
애리조나주 19번 고속도로에는 한동안 "투산까지 64킬로미터"라고 적힌 표지판이 남아있었지만, 이마저도 결국 철거되면서 미국 고속도로에서 미터법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화씨(°F)가 인간 친화적이긴 해!" : 미국인들의 정신 승리
미국인들과 이 주제로 토론을 벌이면, 그들은 나름의 씽크빅 돋는 논리로 화씨와 파운드를 변호합니다. 특히 온도(화씨)에 대한 집착이 강한데,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섭씨(°C): 물(Water)의 기준이다. 0도면 물이 얼고 100도면 물이 끓는다. 네가 물이냐, 인간이냐?
화씨(°F): 인간(Human)의 기준이다. 0도면 진짜 얼어죽게 추운 거고, 100도면 진짜 타죽게 더운 거다. 즉, 인간이 느끼는 일상 날씨를 0~100 구간으로 훨씬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듣고 보면 "어... 그런가?" 싶지만, 섭씨에 익숙한 우리에겐 그저 방어기제 가득한 정신 승리로 보일 뿐입니다. 어차피 영하 20도든 영상 40도든 인간은 다 죽으니까요.
이 단위 고집이 만들어낸 가장 비싸고 유명한 사고가 바로 1999년 NASA의 '화성 기후 궤도선(Mars Climate Orbiter)' 사건입니다. 제작사인 록히드 마틴의 추진 엔지니어들은 추력기의 힘을 파운드(pound-force) 단위로 계산해서 데이터를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NASA의 비행 소프트웨어는 이 데이터를 미터법 단위인 뉴턴(Newton)으로 가정하고 그대로 처리해 버렸습니다.
[록히드 마틴] "추력 데이터 보냈음! (lbf·s 단위)"
[NASA 항법팀] "오케이, N·s 단위겠지?" → 그대로 입력
문제는 1 lbf가 약 4.45 N에 해당한다는 점입니다. 즉 계산값이 약 4.45배 잘못된 셈입니다. 아주 작은 궤도 편차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결국 우주선은 예정 고도 226킬로미터가 아닌 단 57킬로미터 고도에서 화성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화성 기후 궤도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저 고도는 80킬로미터였으니, 57킬로미터는 그야말로 화염 속으로 직진한 셈입니다. 총 3억 2,700만 달러(한화 약 4,300억 원) 규모의 화성 미션이 단위 변환 실수 하나로 공중분해되었습니다. 한 줄의 단위 표기가 잘못되어 우주선이 통째로 산화한 사건이지요.
과학계에서는 이 사건 이후 미터법 통일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미국 마트의 콜라는 여전히 2L 페트병으로 팔리면서 우유는 1갤런 통으로 팔리는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미국 내부도 사실 일관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와인과 증류주는 리터로 팔고, 청량음료는 12온스 캔과 2리터 병이 공존하며, 거리는 마일과 야드와 미터와 킬로미터가 혼재되어 사용됩니다.
처방약은 밀리그램으로 처방되지만 체중은 파운드로 잰다는 식이지요. 미국인 본인들도 이미 매일 미터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전환은 안 돼!"라고 외치는 묘한 상황입니다.
요약하자면 미국이 미터법을 안 쓰는 건 결코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1. 초창기 해적(정확히는 영국 사략선) 때문에 표준 기물 도입 타이밍을 놓쳤고,
2. 덩치가 너무 커진 뒤에 바꾸려니 비용이 상상을 초월하며,
3. 내수 시장이 워낙 탄탄해서 "아쉬운 놈이 미터법 배우겠지" 하는 마인드가 굳어졌고,
4. 미터법을 '외세의 음모'로 보는 정서가 의외로 뿌리 깊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세상 불편해 보이지만, 그들에게 인치와 파운드는 미국 고유의 정체성을 흐르는 DNA 같은 존재인 셈입니다. 그러니 미국에 가실 땐 계산기 앱을 필수로 챙기시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화씨를 섭씨로 바꾸는 공식 (°F − 32) × 5/9는 머리에 새겨두시고요. 아니면 그냥 "80도면 반팔, 50도면 외투" 정도로 외워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런데 미국 군대에서는 예외적으로 미터법을 사용합니다
이유는 국제 작전 때문입니다. 미군은 단독으로 움직이기보다 나토 동맹국들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각 나라가 서로 다른 단위를 쓰면 혼선이 생기고, 실제 전장에서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포병 사격, 항공 작전, 지도 좌표, 탄도 계산 같은 분야에서는 거리와 속도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핵심입니다. 미터법은 전 세계 군대에서 표준처럼 사용되기 때문에, 미군도 여기에 맞추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실제로 군용 지도와 좌표 체계도 미터 단위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어 협력 작전에서 오류를 줄일 수 있습니다.
결국 군대는 "익숙함"보다 "정확성과 표준"이 더 중요한 조직입니다. 그래서 미국도 군사 분야만큼은 현실적으로 미터법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바아뮬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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