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2세 정체성 혼란이 시작되는 나이는 따로 있다 - Phoenix - 1

얼마 전 학부모 모임에서 한 엄마가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자기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하던 아이가, 중학교 들어가더니 갑자기 도시락에 김치 싸주지 말라고 하고 한국 이름 대신 영어 이름만 쓰겠다고 선언했다는 거예요. 주말마다 다니던 한글학교도 이제 안 가겠다고 버틴다고 하더라고요.

부모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얘기지만, 사실 이건 흔한 일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시기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요. 우연히 겹치는 게 아니라 발달 단계상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점이라는 겁니다.

발달심리학 연구를 보면 인종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사춘기, 특히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진 피니가 10학년 학생들을 인터뷰한 유명한 연구가 있는데, 그 결과가 꽤 흥미로워요. 조사 대상 소수인종 학생 중 절반 정도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고, 나머지 중 절반은 한창 고민하는 중이었고, 그 나머지만 어느 정도 정리된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체성 고민을 이미 끝내고 스스로를 받아들인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적이었다는 결과도 함께 나왔고요.

왜 하필 이 시기냐고요.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학교 규모가 커지고 친구 그룹이 세분화되고, 처음으로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또렷하게 인식하게 되거든요. 인종적 다양성을 눈으로 확인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은근한 차별이나 놀림을 처음 겪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우리 집 규칙이던 것들이, 갑자기 남들과 비교당하는 잣대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부모들이 두 갈래로 갈립니다.

한쪽은 이 시기에 오히려 더 강하게 한국 문화를 밀어붙입니다. 한글학교 스케줄을 늘리고 한국 음식을 더 자주 먹이고 한국 예절을 강조하죠. 다른 한쪽은 정반대로 갑니다. 아이가 힘들어하니 일단 놓아주자는 겁니다. 영어 이름 쓰겠다면 쓰게 하고 한글학교 그만두겠다면 그만두게 하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전자 쪽입니다. 아이가 흔들릴 때일수록 뿌리를 더 단단히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춘기에 겪는 정체성 혼란은 부모가 대신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최소한 선택지를 쥐여줄 수는 있잖아요. 한국어를 못 하는 채로 자란 아이는 스무 살, 서른 살 되어서 후회해도 되돌릴 방법이 없습니다. 언어는 한번 놓치면 다시 붙잡기가 정말 어려운 영역이거든요. 반면 지금 좀 힘들어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붙잡고 있으면, 나중에 스스로 정체성을 정리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하나 더 생기는 셈입니다.

물론 이건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학교나 정부가 다양성 프로그램 몇 개 만든다고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거라 기대하는 것도 저는 별로 믿지 않아요. 결국 아이 정체성의 뼈대를 세워주는 건 학교 커리큘럼이 아니라 집에서 부모가 매일 하는 작은 선택들입니다. 밥상머리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주말에 어디를 데려가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나중에 아이가 자기 뿌리를 자랑스러워할지 부끄러워할지를 가르는 거더라고요.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어요. 아이가 놓고 싶어할 때 같이 놓아줄 건가요, 아니면 그럴수록 더 붙잡을 건가요. 정답을 정해주려는 게 아니라, 이 시기가 반드시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준비하자는 얘기입니다.

정체성 혼란이 오는 시기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습니다. 사춘기가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아이가 스스로 뿌리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경험을 최대한 많이 쌓아주는 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