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미국 마켓에 가면 꼭 눈에 들어오는게.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토마토 하나를 한참 들여다보는 어르신들이다.
옆 사람과 날씨 이야기하고, 복숭아가 올해는 비싸다는 이야기도 하면서 한참 웃는다. 급할 게 없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끔 부럽다. 나는 마흔 언저리가 되니까 마켓에서 양파를 골라도 머릿속에서는 전기요금, 각종 보험, 카드값이 동시에 돌아간다. 집에 가면 해야 할 일도 생각나고 다음 달에 나갈 돈도 계산한다. 몸은 야채 코너에 있는데 정신은 이미 다음 달에 가 있다.
그런데 미국인들의 행복도를 연령별로 조사한 자료들을 보면 이런 모습이 단순한 기분만은 아닌 것 같다.
미국에서는 젊은 층의 삶의 만족도가 크게 떨어진 반면 60세 이상은 상대적으로 높은 행복도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행복보고서에서도 미국은 전체 순위보다 60세 이상을 따로 계산했을 때 훨씬 좋은 성적을 보여왔다.
처음에는 좀 이상했다. 나이가 들면 건강 걱정도 많아지고 여기저기 아픈 곳도 생기는데 어떻게 젊은 사람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30대와 40대는 인생에서 돈이 가장 많이 필요한 시기다. 집을 샀으면 모기지를 내야 하고, 렌트도 만만치 않다. 아이가 있으면 교육비가 들어가고 자동차 할부금에 보험료, 식료품비까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직장에서는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압박까지 따라온다.
특히 LA에서는 더 그렇다. 집값 한번 검색하고 렌트 한번 올랐다는 이메일 받아보면 행복이고 뭐고 일단 계산기부터 찾게 된다.
반면 60대 이후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크지만 모기지를 거의 끝냈거나 자녀가 독립하고, 은퇴자금을 어느 정도 마련한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 승진해야 한다는 압박도 줄어든다. 젊었을 때처럼 남들이 어디에 사는지, 무슨 차를 타는지까지 일일이 비교할 이유도 조금씩 줄어든다.
결국 돈이 많아서 행복하다기보다 매달 반드시 벌어야 하는 돈의 액수가 줄어드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물론 모든 노인이 편안한 것은 아니다. 은퇴자금이 부족한 사람도 많고 의료비나 주거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나이 들었다고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노년층에게는 돈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자산이 있다. 경험이다.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는다. 직장을 잃기도 하고 사업이 꼬이기도 하고,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가족 문제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60년, 70년을 살았다면 웬만한 사건은 한두 번씩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 하나 생겼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인간관계도 달라진다. 젊을 때는 직장이나 사업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만 남는다. 교회든 시니어센터든 동네 모임이든 정기적으로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꽤 중요하다. 결국 행복에 영향을 주는 건 돈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연결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요즘 파머스마켓에서 어르신들을 보면 예전과 조금 다르게 보인다. 토마토를 천천히 고를 수 있는 여유가 단순히 시간이 많아서 생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수십 년 동안 정신없이 살고, 갚을 것 갚고, 키울 사람 키우고, 겪을 일 겪은 뒤에 얻은 여유일 수도 있다.
나도 이제 행복이라는 게 많이 갖는 것하고만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매달 걱정해야 할 것이 하나씩 없어지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모기지 하나 없어지고, 카드빚 하나 없어지고, 남과 비교하는 마음 하나 없어지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이 드는 것도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마켓에서 세일 가격부터 확인하고 토마토를 장바구니에 던져 넣지만, 언젠가는 나도 토마토 하나 들고 한참 고민할 만큼 한가해질 날이 오겠지.
그때는 가격표부터 보지 않고 정말 맛있게 생겼는지부터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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