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밍햄을 처음 가면 의외로 심심한 도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층빌딩도 많지 않고, 뉴욕처럼 사람에 치일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살아보면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도시, 생각보다 놀 줄 아네?" 겉으로는 조용한데 달력을 열어보면 축제가 끊이질 않습니다. 미국에는 축제가 많은 도시가 많지만, 버밍햄은 인구 규모를 생각하면 행사 밀도가 꽤 높은 편입니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슬로스 페스트(Sloss Fest)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7월이면 슬로스 퍼니스(Sloss Furnaces)에서 거대한 음악 축제가 열렸습니다. 19세기 제철소를 그대로 보존한 산업 유적지에서 공연을 하는데, 처음 사진을 보면 "여기 공장이야, 콘서트장이야?" 싶은 분위기입니다. 인디와 얼터너티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 만족할 만한 행사였습니다. 산업도시의 흔적을 문화 공간으로 바꿔버린 미국식 발상이 재미있기도 합니다.
10월이 되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매직 시티 클래식(Magic City Classic)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앨라배마 A&M과 터스키기대학교가 맞붙는 HBCU 풋볼 경기인데, 솔직히 말하면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보다 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아 보입니다. 경기장 주변은 하루 종일 바비큐 연기와 음악이 끊이지 않고, 도시 전체가 하나의 파티장처럼 변합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풋볼을 종교처럼 생각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직접 느끼게 됩니다.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오히려 화려한 축제가 아니라 페퍼 플레이스 새터데이 마켓(Pepper Place Saturday Market)입니다. 4월부터 12월까지 거의 매주 토요일 열리는데, 지역 농부들이 직접 가져온 채소와 과일, 수제 빵, 커피, 공예품이 가득합니다.
관광객보다 동네 주민이 더 많습니다. 이런 곳을 보면 '이 도시는 주민들이 실제로 즐기는 문화가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사이드워크 필름 페스티벌(Sidewalk Film Festival)도 꽤 괜찮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대신 독립영화가 중심인데, 유명 배우를 보러 가는 행사가 아니라 새로운 감독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화려함은 없지만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진지하게 즐깁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버밍햄 레스토랑 위크도 추천할 만합니다. 평소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던 레스토랑들이 특별 코스를 할인된 가격에 내놓습니다. 미국은 외식비가 만만치 않은 나라라 이런 행사 기간을 잘 이용하면 꽤 괜찮은 식사를 합리적인 가격에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마니아라면 BJCC에서 열리는 월드 오브 휠스(World of Wheels)도 재미있습니다. 클래식카와 머슬카, 커스텀 차량들이 줄지어 전시되는데, 미국 사람들이 왜 차에 그렇게 돈을 쓰는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골프 팬이라면 PGA 챔피언스 투어 메이저 대회인 리전스 트래디션(Regions Tradition)도 전국에서 관람객이 찾아오는 행사입니다.
버밍햄의 이런 행사들을 보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느끼게 됩니다. 뉴욕처럼 "우리가 최고다" 하고 떠드는 분위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자기들끼리 즐기고, 그걸 방문객도 자연스럽게 함께 즐기게 만드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 기대 없이 갔다가 의외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결국 버밍햄은 화려한 관광도시는 아닙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랜드마크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직접 만들고 오랫동안 이어온 행사들은 생각보다 탄탄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여긴 재미없겠다"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아까운 도시입니다. 미국에는 돈으로 만든 관광지가 있고,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문화가 있습니다. 버밍햄은 분명 후자에 더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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