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지인 댁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갔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봤어요. 할머니가 손주에게 "밥 더 먹을래?" 하고 물으니, 손주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빠를 쳐다보더군요.
아빠가 "Grandma wants to know if you want more rice" 하고 통역을 해주니 그제야 "Yes, please!" 하고 대답했어요.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살짝 시큰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죠? 이민 1세는 한국어로 꿈을 꾸고, 2세는 알아듣긴 하는데 대답은 영어로 하고, 3세는 김치는 좋아해도 "김치" 말고는 아는 단어가 별로 없는 그 풍경 말이에요.
학자들은 이걸 오래전부터 "3세대 법칙", 영어로는 three-generation model이라고 불러왔어요. 언어학자 조슈아 피시먼이 1966년에, 캘빈 벨트먼이 1983년에 이 흐름을 정리한 것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내용은 간단해요. 1세는 영어를 배우면서도 집에서는 모국어를 씁니다. 2세는 두 언어를 오가는 bilingual이 되고요.
그리고 3세에 이르면 집에서 쓰는 말이 영어로 바뀌고, 조상의 언어는 대부분 사라진다는 겁니다. 듣고 보니 우리 동네 이야기 같지 않나요?
이게 마치 오래된 차 엔진 오일이랑 똑같아요. 처음엔 진하고 맑던 오일이 갈아주지 않으면 몇 만 마일 지나서 묽어지고 결국 바닥나잖아요. 언어도 가정에서 계속 보충해주지 않으면 세대를 지날수록 옅어집니다.
그럼 이 법칙이 옛날 유럽 이민자들 이야기일 뿐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더군요. 2002년 학술지 Demography에 실린 연구가 최근 이민자들에게도 이 공식이 맞는지 확인해봤습니다.
결과가 좀 씁쓸했어요. 아시아계 후손들의 영어화 속도가 예전 유럽계 이민자들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스페인어를 쓰는 집안 후손들은 그나마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고 해요. 같은 연구는 3세의 집안 언어를 좌우하는 요인으로 타민족과의 결혼, 그리고 주변 커뮤니티 환경을 꼽았습니다.
캘리포니아 이야기도 있어요. 2006년 루벤 럼바우트, 더글러스 매시, 프랭크 빈 세 학자가 LA와 샌디에이고 설문 자료로 "언어의 기대수명"이라는 걸 계산했습니다.
사람의 기대수명을 계산하는 방식을 언어에 적용한 건데, 발상이 참 기발하죠. 한 언어가 이민 온 뒤 몇 세대까지 살아남는지를 따져본 겁니다.
스페인어처럼 사용자가 엄청나게 많은 언어조차도 3세대쯤 가면 결국 힘을 잃는다는 결론이었어요. 스페인어가 그렇다면 한국어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실제로 한국어를 계승어, 즉 heritage language로 연구한 학자들은 한국어가 특히 빨리 잊히기 쉬운 언어라고 지적합니다. 영어 일색인 환경에서는 보통 2세나 3세 무렵에 사라진다는 거예요.
왜 한국어가 유독 약할까요. 제 생각엔 한인 사회가 중국계나 히스패닉계만큼 크지 않고, 동네마다 흩어져 사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
한인타운 한복판이 아니면 아이가 학교에서 한국어를 들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마트에서도, 축구 연습장에서도, 친구 생일파티에서도 전부 영어니까요.
그런데 희망적인 연구도 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대학생 120명을 조사한 연구에서, 한국어 실력을 가장 잘 예측하는 요인은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한국어를 쓰느냐였다고 해요.
이민 온 나이나 한국어 학교를 다닌 기간보다 평소에 실제로 쓰는 빈도가 더 중요했다는 거죠. 이론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제 평소 생각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우리 집 강아지를 보면 이해가 쉬워요. "앉아", "기다려"를 매일 하면 척척 알아듣는데, 한 달만 안 하면 이 녀석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봅니다. 사람 말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거창한 교육보다 부엌이 제일 좋은 한국어 교실이라고 믿습니다. 같이 만두를 빚으면서 "이거 터지지 않게 꼭꼭 눌러" 하고 말해주면 아이들이 단어를 몸으로 기억하더라고요.
떡볶이 양념을 섞으면서 "맵다", "달다", "짜다"를 맛으로 배우면 단어장 열 장보다 오래 갑니다. 먹는 걸로 배운 말은 잘 안 잊혀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영상통화도 생각보다 효과가 있어요. 손주 입장에서는 한국어가 숙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는 통로가 되니까요.
물론 현실적으로 모든 집이 완벽한 이중언어 가정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부 중 한 명이 한국어를 못 하는 집도 많고, 맞벌이에 지치다 보면 저녁 대화는 자연스럽게 영어로 흘러가지요.
그렇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봐요. 3세대 법칙은 법칙이라기보다 아무것도 안 했을 때 흘러가는 기본값에 가깝습니다. 기본값은 바꿀 수 있어요.
요즘은 K-드라마와 K-팝 덕분에 3세 아이들이 스스로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경우도 늘었다고들 하지요. 어른들 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바람입니다.
제가 대신 여러 집을 지켜봤으니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완벽한 문법보다 매일 한 마디가 낫습니다. "잘 자", "사랑해", "밥 먹자" 같은 짧은 말이라도 꾸준히 들려주세요.
엔진 오일도 제때 조금씩 보충하면 차가 오래 가잖아요. 한국어도 그렇게 조금씩, 꾸준히 채워주면 3세대 법칙을 4세대, 5세대까지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저녁엔 손주에게 영어 말고 한국어로 "맛있게 먹어" 한 마디 건네보시는 건 어떨까요. 생각보다 큰 변화의 시작이 될 수도 있어요.

홈런왕편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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