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마당 라벤더를 마지막으로 잘라 말리던 오후였어요. 손끝에 남은 향이 아직 진한데, 같이 정원 모임을 하는 언니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아들 목소리로 전화가 왔는데 사고가 났다며 울더래요. 다행히 끊고 아들에게 직접 걸어서 회사에서 멀쩡히 일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고 했어요.
그 언니 말이 제일 마음에 걸렸어요. 숨 쉬는 소리까지 똑같아서 처음 몇 초는 의심이 전혀 안 들었다고요.
예전에는 엄마 나야 하는 전화가 오면 목소리가 이상해서 금방 알아챘잖아요. 이제는 목소리로 가려내던 그 마지막 방어선이 조용히 무너진 셈입니다.
AI 음성 복제는 짧은 음성 샘플만 있어도 그 사람 말투를 흉내 낸다고 해요. 소셜미디어에 올린 짧은 영상 하나가 재료가 될 수 있다는 뜻이죠.
목소리만 문제가 아니에요. 울먹이는 톤, 다급한 말버릇까지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니 듣는 쪽은 생각할 틈이 없어집니다.
FBI는 2024년 12월 3일 생성형 AI를 악용한 사기에 대한 공공 경고를 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칭한 긴급 상황 전화를 대표적인 예로 들었습니다.
그 경고문에서 권한 방법 중 하나가 가족끼리만 아는 비밀 단어나 문구를 정해두는 거예요. 위급한 전화가 오면 그 단어부터 물어보라는 거죠.
FTC 소비자 안내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가족 암호를 미리 만들어두고,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암호를 물어보라고 해요.
규모를 보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에요. FTC 자료로는 2025년 한 해 사칭 사기로 신고된 피해액이 35억 달러였습니다.
사칭 사기는 전체 사기 신고의 세 건 중 한 건 가까이를 차지했다고 해요. 숫자를 보는데 괜히 손이 차가워지더군요.
물론 이 금액이 전부 가족 사칭은 아니에요. 은행, 정부기관, 회사를 사칭한 경우까지 다 합친 수치입니다.
그래도 가족 목소리는 이성을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소리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번 주말에 저희 집 암호를 만들기로 했어요.
암호를 정할 때 제가 세운 기준은 세 가지예요. 남이 추측할 수 없을 것, 온라인에 한 번도 올라간 적 없을 것, 급할 때도 바로 떠오를 것.
강아지 이름이나 생일, 출신 학교는 피하는 게 좋아요. 그런 건 소셜미디어 몇 번만 훑어도 다 나오는 정보니까요.
차라리 우리끼리만 아는 엉뚱한 기억이 좋아요. 어릴 때 캠핑 가서 태운 음식 이름이라든지, 할머니가 부르던 별명 같은 거요.
저는 처음 키우다 시들게 만든 허브 이름으로 정할까 생각 중이에요. 물을 너무 줘서 뿌리가 썩어버린 그 실패담은 가족 말고는 아무도 모르거든요.
암호를 하나 더 만들어두는 집도 있다고 해요.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 말을 제대로 못 할 때 쓰는 신호용 단어를 따로 정해두는 거죠.
암호는 문자나 단톡방에 적어두지 않는 게 좋아요. 식탁에 둘러앉아 직접 말로 정하고, 각자 기억하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부모님께는 특히 천천히 여러 번 설명드려야 해요. 귀가 어두우시거나 놀라시면 암호를 물어볼 생각조차 못 하실 수 있거든요. 한국어로 걸려오는 전화도 있으니, 언어가 익숙하다고 마음을 놓으시면 안 된다고 꼭 말씀드리세요.
전화를 받았을 때 순서도 미리 정해두면 덜 당황해요. 먼저 암호를 묻고, 대답을 못 하거나 얼버무리면 일단 끊습니다.
그다음 내가 원래 알고 있는 번호로 그 가족에게 직접 걸어요. 연락이 안 되면 다른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 확인하라는 게 FTC 안내입니다.
상대가 끊지 말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다그치면 그게 바로 신호예요. 진짜 가족이라면 확인할 시간을 막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돈을 보내는 방법도 잘 봐야 해요. 기프트카드 번호와 PIN을 불러달라거나, 송금이나 암호화폐를 요구하면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FTC는 경고합니다.
FBI는 목소리와 사진을 온라인에 공개하는 범위를 줄이라고도 했어요. 저도 정원 영상에 제 목소리를 넣던 습관을 좀 줄여보려고요.
계정을 비공개로 돌리는 것만으로도 재료를 덜 내주는 셈이에요. 아이들 영상도 가까운 사람끼리만 보게 설정해두면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혹시 이미 이런 전화를 받았다면 ReportFraud.ftc.gov에 신고할 수 있어요. 돈을 보냈다면 은행이나 카드사에도 바로 연락하는 게 먼저입니다.
한 번 정했다고 끝이 아니에요. 몇 달에 한 번쯤 가족끼리 기억하고 있는지 가볍게 확인하고, 혹시 누군가에게 새어 나갔다 싶으면 바로 바꾸면 됩니다.
사실 암호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따뜻했어요. 가족끼리 옛날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한참을 웃었거든요.
기술이 아무리 목소리를 흉내 내도 우리만 아는 기억까지는 훔칠 수 없잖아요. 그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마른 라벤더 다발을 창가에 걸어두며 생각했어요. 오늘 저녁 식탁에서, 여러분도 가족만의 작은 암호 하나 정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아이둘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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