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이를 먹으니까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더 부럽네요 - San Diego - 1

요즘 자꾸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서울 강남 아파트 단지에 살았거든요. 그때 단지 상가에 있는 피아노 학원을 한 반년 정도 다녔어요.

뭘 대단하게 배운 것도 아니에요. 딱 바이엘 초보 수준이었죠.

학교 끝나고 학원에 가면 조그만 방마다 피아노가 한 대씩 있었는데, 여기서는 바이엘 치고 저쪽에서는 체르니 치고 아주 정신이 없었어요.

저는 그 사이에서 손가락 번호 맞춰가며 도레미파솔 치던 아이였고요.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우리 집이 대구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피아노를 그만두게 됐어요.

대구에서 학교 다니다가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그 뒤로는 피아노 건반 한번 제대로 만져볼 일이 없었네요.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죠?

샌디에이고에서 살면서 가끔 남의 집에 갔는데 거실 한쪽에 피아노가 놓여 있으면 그렇게 부러운 거예요.

어머, 나도 집에 저거 한 대 놓고 싶다.

거창한 그랜드피아노 말고 그냥 까만 피아노 한 대요. 저녁에 커피 한잔 마시다가 생각나면 앉아서 몇 곡 치고 그러면 얼마나 분위기 있고 좋아요?

근데 우리 집에는 놓을 자리가 없어요. ㅋㅋ

미국 집이라고 다 운동장처럼 넓은 줄 아시면 안 돼요. 소파 놓고 테이블 놓고 이것저것 살림살이 들어가면 피아노 한 대 들어갈 벽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피아노를 잘 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피아노에 미련이 있나 생각해 봤거든요.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요.

저는 피아노 잘 치는 사람들의 손가락 기술이 부러운 게 아니었어요. 그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다른 사람한테 전달할 줄 알잖아요.

그게 참 부러운 거 있죠.

똑같은 곡인데 누가 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이 치면 그냥 듣기 좋은 피아노곡인데, 어떤 사람이 치면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고 괜히 마음이 찡해져요.

말 한마디 안 했는데도요.

살다 보면 나이 먹을수록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참 많아지는 것 같아요.

누가 보고 싶은데 연락하기는 싫고, 옛날이 그리운데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고, 마음이 좀 허전한데 그렇다고 내가 불행한 것도 아니고요.

참 애매하잖아요?

그런데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은 그런 걸 건반 몇 개 눌러서 사람한테 전달해 버리는 거예요.

유튜브에서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을 보면 저는 손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나보다 그 사람 표정을 더 보게 돼요.

자기가 치는 음악 안에 푹 들어가 있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더라고요.

가끔 그런 생각도 해요.

내가 대구로 이사 가서도 계속 피아노를 배웠으면 지금쯤 한두 곡은 멋지게 칠 수 있지 않았을까?

뭐, 현실적으로는 체르니 들어가기도 전에 지겨워서 때려치웠을 수도 있죠. ㅋㅋ

그래도 언젠가는 집에 피아노 한 대 놓고 싶어요.

나중에 조금 더 넓은 집으로 가게 되면 거실 한쪽에 피아노 하나 놓고 다시 배워볼까 봐요. 바이엘부터 다시 시작하면 또 어때요.

마흔이 되고 보니까 뭔가를 잘하는 사람보다 자기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가진 사람이 더 부럽더라고요.

저한테는 그게 피아노예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손가락으로 대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아이고, 그래서 피아노 잘 치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부러운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