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밍햄 남쪽 레드마운틴 꼭대기에 올라가면 거대한 쇠붙이 사내 하나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대장장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한 손에는 망치, 다른 손에는 창을 든 모습입니다. 이 동상의 이름이 벌컨(Vulcan)입니다.
처음 보는 분들은 대개 이 동네를 지키려고 세운 기념물이겠거니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출발점이 전혀 다릅니다.
벌컨은 원래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에 내보낼 출품작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버밍햄이라는 도시의 홍보용 전시물이었던 셈이죠.
아이디어를 낸 곳은 정부가 아니라 버밍햄 상공인 모임인 커머셜 클럽(Commercial Club)이었습니다. 철강 도시 버밍햄을 전국에 알릴 방법을 찾다가, 철로 만든 거대한 사람을 보내자는 결론에 이른 겁니다.
조각은 이탈리아 출신 조각가 주세페 모레티가 맡았습니다. 소재로는 로마 신화에서 불과 대장장이의 신인 벌컨을 골랐습니다. 철과 용광로로 먹고사는 도시에 이보다 맞는 상징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주조는 1904년 봄, 버밍햄 스틸 앤드 아이언 컴퍼니가 맡았습니다. 슬로스 용광로에서 나온 이 지역 선철(pig iron)을 그대로 썼다고 합니다. 재료부터 마케팅까지 철저하게 로컬이었던 거죠.
완성된 키는 56피트입니다. 여러 조각으로 나눠 주조한 뒤 볼트로 이어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주철 동상이라는 타이틀이 지금까지 따라다닙니다. 사진으로만 보면 실감이 덜하지만, 아래에 서 보면 고개가 저절로 젖혀집니다.
박람회장에서 벌컨은 광업과 야금관(Palace of Mines and Metallurgy) 안에 세워졌습니다. 건물 안 다른 전시물들을 압도할 만큼 컸다고 전해집니다.
결과도 좋았습니다. 벌컨은 그랑프리를 받았고 모레티와 주조 업체도 메달을 받았습니다. 홍보물로서는 대성공이었던 셈입니다.
박람회가 끝나자 세인트루이스와 샌프란시스코 쪽에서 동상을 사겠다는 제안까지 들어왔습니다. 버밍햄은 이를 거절하고 1905년 2월 동상을 분해해 고향으로 실어 왔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운송비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벌컨은 한동안 기찻길 옆에 조각난 채 방치됐습니다. 그랑프리 수상작의 귀향치고는 참 초라했죠.
결국 벌컨은 앨라배마 주 박람회장(State Fairgrounds)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서둘러 조립하다 보니 팔을 엉뚱하게 붙여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손에 창을 쥐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빈손이 된 거인에게 사람들은 광고판 노릇을 시켰습니다.
코카콜라 병, 아이스크림콘, 하인즈 피클 같은 상품을 손에 들려 놓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불과 대장장이의 신이 피클 광고를 하고 있었다니,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대목이 꽤 미국답다고 봅니다. 쓸모가 있으면 신이든 영웅이든 일단 써먹고 보는 그 실용주의 말입니다.
벌컨의 운명이 바뀐 건 1930년대입니다. 키와니스 클럽이 앞장서서 동상을 레드마운틴으로 옮기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공사비의 상당 부분은 대공황기 연방 일자리 사업인 WPA가 댔습니다. 사암으로 쌓은 높은 받침대가 이때 만들어졌고, 1939년에 공원 공사가 마무리됐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1946년 버밍햄 청년상공회의소가 창 끝을 네온 횃불로 바꿨습니다.
평소에는 초록불이 켜지고, 교통사고 사망자가 나오면 빨간불이 켜지는 방식이었습니다. 동상이 교통안전 캠페인 도구가 된 것입니다.
1971년에는 받침대를 넓히고 엘리베이터와 실내 전망대를 들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동상 내부는 속으로 병들고 있었습니다.
예전 수리 때 가슴 높이까지 콘크리트를 채워 넣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1990년 엔지니어링 조사에서는 붕괴 위험이 있다는 결론까지 나왔습니다.
1999년 벌컨 파크 재단이 세워졌고, 같은 해 동상은 받침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앨라배마의 철 공예 업체 로빈슨 아이언이 수리와 일부 재주조를 맡아 창끝과 망치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받침대는 1930년대 모습에 가깝게 되돌렸고, 70년대에 덧붙인 시설은 걷어냈습니다. 그리고 2004년 3월, 벌컨 파크 앤드 뮤지엄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그해 6월에는 벌컨의 100번째 생일 행사도 열렸습니다. 박람회 출품작으로 태어나 한 세기를 버틴 셈입니다.
현지 사람들이 빼놓지 않는 농담도 하나 있습니다. 벌컨의 엉덩이가 이웃 도시 홈우드 쪽을 향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앞치마 하나뿐이니 뒤쪽은 그대로 드러나 있거든요.
제가 이 동상에서 배운 건 이겁니다. 도시의 상징은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으로 만들어지기보다, 장사꾼들의 홍보 아이디어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민간이 먼저 움직였고, 우여곡절 끝에 시민들이 다시 살려 냈습니다. 그 과정이 오히려 기념비보다 더 기념할 만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버밍햄을 지나가실 일이 있으면 레드마운틴에 한번 올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전망대에 서면 벌컨이 왜 하필 이 언덕에 있는지 금방 이해가 되실 겁니다.

SweetH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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