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마다 미국 전역을 뒤덮는 호박향, 그 진짜 정체는 - Riverside - 1

마트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냄새가 있다. 시나몬과 넛맥이 뒤섞인, 어쩐지 따뜻한 향이다. 아, 또 이 계절이 돌아왔구나 싶어진다.

카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메뉴판엔 호박이 큼지막하게 붙고, 매대엔 가을 향 캔들이 줄줄이 늘어선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이 호박향은 대체 언제부터, 왜 미국 전역을 이렇게 장악하게 됐을까.

사실 이 향신료 조합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됐다. 1796년에 나온 미국 최초의 요리책 아메리칸 쿠커리에도 생강과 메이스, 넛맥, 올스파이스로 맛을 낸 호박파이 레시피가 실려 있었다. 이걸 상품으로 처음 묶어 판 건 매코믹으로, 1934년 캔에 담긴 호박 퓨레가 막 나오던 시기에 파이용 향신료 블렌드를 내놓으면서 지금 형태의 표준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오래된 향을 세계적인 유행으로 끌어올린 건 따로 있다. 2003년, 스타벅스의 실험 공간에서 태어난 펌킨 스파이스 라떼가 그 도화선이다.

처음엔 밴쿠버와 워싱턴 D.C.의 매장 100곳에서만 조용히 시험 판매됐다.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미 자리 잡고 있던 페퍼민트 모카와 에그노그 라떼의 판매 기록까지 가볍게 넘어서면서, 이듬해 곧바로 미국 전역 매장으로 퍼졌다.

그 뒤 10년 동안 팔린 잔 수만 2억 잔. 스타벅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료라는 타이틀까지 따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 하나. 이 라떼엔 사실 호박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실제 펌킨 성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고, 맛의 대부분은 향신료가 만들어낸다.

향의 정체는 시나몬, 넛맥, 정향, 생강을 섞은 향신료 블렌드다. 이름만 호박을 빌려 쓴 셈이다.

영화로 치면 제목에 주연 배우 이름을 걸어놓고 정작 화면은 조연들이 다 채우는 구성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향신료 조합이 사람 마음을 이렇게까지 흔드는 걸까.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기억을 훨씬 단단히 붙잡아 둔다는 연구가 있다. 냄새 하나가 특정 계절, 특정 장면 전체를 통째로 불러온다는 것이다.

시나몬과 생강 냄새를 맡으면 어릴 적 가을 풍경, 학교 다니던 시절, 가족이 둘러앉던 순간들이 자동으로 딸려 나온다.

여기에 단풍과 개학, 할로윈 준비 같은 계절적 배경까지 겹치면서 이 향이 통째로 가을의 상징이 돼버렸다.

게다가 시나몬과 생강 같은 향신료엔 몸을 데워주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기온이 뚝 떨어지는 시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조합이다.

심리적 향수와 물리적 온기가 한 향에 같이 얹혀 있으니, 해마다 이 냄새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이 향이 라떼 한 잔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이 향을 입은 상품의 종류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시리얼과 과자, 방향제와 캔들까지 가을만 되면 죄다 호박향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반려동물 간식이나 손세정제 코너에서도 이 향을 심심찮게 만난다.

여기에 소셜미디어까지 가세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첫 잔을 인증하는 게시물이 꾸준히 유행을 만들어내며 다시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도 향초 업계의 존재감이 특히 크다. 얀키 캔들 같은 브랜드는 가을마다 한정판 향을 내놓으며 팬덤에 가까운 소비를 만든다.

2021년 한 해 미국인들이 향초에 쓴 돈만 58억 달러로 집계됐다. 웬만한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 제작비가 우습게 느껴지는 액수다.

얀키 캔들이라는 브랜드 하나의 가치만 따져도 12억 달러를 넘는다고 하니, 향 하나로 이 정도 시장을 키워낸 셈이다.

마케팅 관점에서 보면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맘때만 살 수 있다는 한정판 전략이 소비자의 조급함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정해진 시기에만 등장했다가 사라지니, 사람들은 그 짧은 기간을 놓치지 않으려 지갑을 연다.

시즌 한정으로 걸리는 영화에 관객이 몰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언제든 볼 수 있는 작품보다 지금 아니면 못 보는 작품에 줄을 서는 법이니까.

재미있는 건 이 열풍이 유독 미국에서만 이 정도로 진하다는 점이다. 향 하나에 계절 전체를 실어 보내는 문화가 이만큼 뿌리내린 나라는 흔치 않다.

굳이 매장표 캔들을 사지 않아도 비슷한 온기는 낼 수 있다. 냄비에 시나몬 스틱과 정향 몇 알을 넣고 끓이기만 해도 집 안 전체에 그 가을 향이 퍼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향이 조금 과하다 싶을 때가 있다. 동네 마트, 미용실, 은행 창구까지 전부 같은 향이면 이건 계절감이라기보다 향신료 홍수에 가깝지 않은가.

그래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도 모르게 코를 킁킁대며 그 향을 반갑게 맞는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결국 다시 찾게 되는, 낯익은 속편 같은 존재다.

결국 이 호박향 열풍은 향 자체의 힘이라기보다 기억과 계절, 마케팅이 절묘하게 맞물린 결과에 가깝다. 향신료 몇 가지가 이만큼 큰 산업을 굴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냄새 하나로 온 마을에 가을을 예고하는 이 나라의 방식은 생각보다 영리하다. 계절 하나를 통째로 브랜딩해버린 셈이니까.

올가을에도 그 냄새를 맡거든, 그저 마케팅이라며 시큰둥해하기보다 못 이기는 척 한 번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