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교엔 '반장'이 없는 대신 이런 게 있다 - New York - 1

학교 다녀본 사람이라면 새 학기 반장 선거 기억이 다들 하나쯤 있을 거다. 칠판 앞에 나가서 어색하게 손 들고 한 표씩 받던 장면, 의외로 오래 남는다.

그런데 미국 학교에는 이 반장이라는 자리 자체가 아예 없다.

처음 들었을 때는 좀 의아했다. 그럼 줄은 누가 세우고 심부름은 누가 하나 싶었으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식 답은 따로 있다. 반장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돌아가며 나눠 맡는 방식이다.

미국 초등학교 교실에는 '클래스룸 잡스(Classroom Jobs)'라는 게 있다.

줄 맨 앞에서 반 친구들을 이끄는 라인 리더, 문을 잡아주는 도어 홀더, 줄 맨 뒤를 챙기는 역할, 유인물을 나눠주는 아이, 출석을 돕는 아이, 교실 식물에 물 주는 아이까지 종류가 꽤 다양하다.

이런 클래스룸 잡스를 쓰는 교실은 보통 한 반에 열 개에서 열다섯 개 정도의 직책을 두는 걸 적당한 기준으로 삼는다.

이름을 붙이는 방식도 꽤 다양하다. 학급 소품이나 용돈 활동을 관리하는 뱅커, 교실 안 매점 같은 코너를 맡는 스토어 클럭, 친구를 챙겨주는 역할인 포지티비티 패트롤처럼 이름부터 재미를 살린 경우도 많다.

핵심은 이 역할들이 한 명에게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면서 반 학생 전원이 순서대로 맡는다.

그러니까 이건 '리더를 뽑는' 시스템이 아니라 '책임을 나눠 갖는' 시스템에 가깝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반장이라는 이름도 원래부터 쓰이던 말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급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광복 이후에 들어서야 지금의 반장이라는 명칭이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학교에 따라 반장 대신 회장이라는 이름을 쓰는 곳이 있는 걸 보면, 이름 하나조차 처음부터 고정된 전통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렇게 짜놓은 이유도 짐작이 간다. 특정 아이만 계속 눈에 띄고 나머지는 늘 구경만 하는 상황을 피하려는 거다. 그래서 한국 교실에 익숙한 인기투표성 경쟁이 미국 초등 교실 단위에서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국 학교에 선거나 리더 자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학년 전체, 혹은 학교 전체를 대표하는 학생회와 학생회장 자리는 따로 존재한다.

이 학생자치의 뿌리는 꽤 오래됐다. 1893년 뉴욕의 한 공립학교에서 버나드 크론슨이라는 교육자가 '스쿨 시티(school city)'라는 이름의 자치 제도를 시작한 게 초기 형태로 꼽힌다.

1920년대 들어서는 학교를 청소년 생활의 중심으로 보는 분위기 속에서 학생회가 고등학교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전국 규모 학생회 조직도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1931년으로 이어진다. 오클라호마의 한 고등학생이던 워렌 셜이 전국 학생회장들을 모아 조직을 꾸린 게 시작이었다.

워렌 셜은 원래 오클라호마 새펄파 고등학교 자체의 학생회장이었다. 전국 조직이 만들어지기 한 해 전인 1930년에 이미 오클라호마 지역 단위로 학생회장들끼리 모이는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이듬해인 193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당시 미국교육협회 회장을 만나면서 지금의 전국학생회협의회(NASC) 전신이 정식으로 출범했고, 1943년부터는 전미 중고교 교장협회가 이 조직의 운영을 넘겨받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정리하면 반장은 교실 관리직에 가깝고, 학생회장은 학년이나 학교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적 자리에 더 가깝다.

그래서인지 학생회장 선출 과정은 한국 반장 선거보다 훨씬 '진짜 선거'스럽다. 공약을 담은 연설, 포스터, 슬로건까지 갖추고 정해진 투표일에 표를 받는 구조니까.

다만 포스터는 손으로 그리거나 집 프린터로 뽑은 것만 허용하는 학교가 많다. 전문 인쇄물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규정까지 있을 정도다.

정치인 흉내를 너무 그럴듯하게 내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처럼 보여서, 이 대목이 나는 은근히 재밌었다.

다만 학생회장 선거라고 다 이렇게 요란한 것도 아니다. 학교 규모가 작으면 후보가 한두 명뿐이라 사실상 추대에 가까운 경우도 흔하다.

결국 미국 학교는 '매일의 리더' 한 명을 키우는 대신, '가끔의 정치인'을 뽑는 구조를 택한 셈이다.

이 방식의 장점은 분명하다. 특정 학생이 계속 자리를 독점하며 생기는 부작용이 구조적으로 줄어든다.

물론 단점도 있다. 학생회는 결국 인기 있고 발 넓은 학생들 위주로 돌아간다는 지적도 꾸준히 나온다.

아이를 미국 학교에 보내는 부모라면 이 클래스룸 잡스 차트를 한 번쯤 눈여겨볼 만하다. 이번 주에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아이와 나눌 대화거리가 하나 생기니까.

개인적으로는 매주 돌아가며 책임을 나눠 갖는 클래스룸 잡스 쪽에 더 믿음이 간다. 결과보다 과정에서 다들 한 번씩 역할을 맡아본다는 게 실용적으로 느껴져서다.

스포츠팀 주장이나 동아리 회장 같은 자리도 결국 이런 분산형 리더십 모델의 연장선이라고 보면 된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두 시스템은 애초에 가르치려는 것 자체가 다르니까.

한국 반장 제도가 책임과 신뢰를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훈련이라면, 미국 클래스룸 잡스는 누구나 한 번씩 맡아보는 훈련에 가깝다. 가끔은 우리 반장이 그리워질 것 같고, 가끔은 이쪽이 더 마음 편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굳이 하나 고르라면 나는 순서대로 돌아가는 쪽에 한 표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