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파소에서 한 10년정도 살다보면 이 도시를 한마디로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가 애매하다.
일단 10년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여기서 살만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되니까.
그렇다고 남에게 여기 좋으니까 와서 살아보라고 하기도 어려운 포인트가 좀 있다.
특히 미국에 처음 정착하는 이민자 입장에서 보면 장점과 단점이 막 섞인 느낌이랄까.
돈 생각하면 괜찮고, 직장 생각하면 아쉽고, 조용해서 좋다가도 너무 조용해서 심심하다.
일단 가장 현실적인 장점은 생활비 부담이 확실히 낮은 편이다. 특히 집값과 렌트가 LA나 샌디에이고 같은 서부 대도시와 비교하면 상당히 싸다.
텍사스라 주 개인소득세도 없다. 월급이 엄청나게 높지 않은 사람이라도 주거비에서 숨통이 트이면 생활 자체가 달라진다. 미국에서는 결국 한 달에 얼마 버느냐도 중요하지만, 다 쓰고 얼마 남느냐가 더 중요하다.
개스비도 비교적 싼 편이고 주차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대도시보다 적다. 물론 여기서 살려면 차는 필수다.
엘파소 대중교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Transit Score가 낮은 도시라 자동차 없이 살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LA에서 차가 필요하다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여기서는 차가 필수이다.
국경 도시라고 하면 외지 사람들은 괜히 위험할 것부터 생각한다. 바로 건너편이 멕시코 시우다드후아레스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실제 엘파소에서 생활해 보면 미국 내에서 비교적 안전한 대도시라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평범한 주택가에서 생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국경도시라는 이미지와 실제 생활 사이에 차이가 꽤 크다.
이민자에게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도시다.
마트에 가도, 식당에 가도, 병원에 가도 스페인어가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래서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이민자가 느끼는 심리적인 부담도 다른 미국 도시보다 덜할 수 있다. 여기는 애초에 두 문화가 섞여 있는 것이 일상이다.
물론 직업 문제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Fort Bliss를 중심으로 한 군 관련 산업과 의료, 교육, 물류, 제조업 비중이 크다.
반대로 IT, 금융, 대기업 본사 같은 전문직 시장은 댈러스나 오스틴, 휴스턴과 비교하기 어렵다. 젊어서 커리어를 공격적으로 키우려는 사람이라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날씨도 호불호가 있다. 여름에는 95°F를 넘는 날이 흔해서 처음에는 정말 뜨겁다. 그래도 습도가 높은 텍사스 동부와 달리 건조해서 그늘에 들어가면 느낌이 조금 다르다. 물 부족 문제는 사막 도시인 만큼 장기적으로 계속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게 엘파소는 텍사스인데 Mountain Time을 쓴다.
그래서 LA와는 대부분의 기간에 한 시간 차이밖에 안 난다. 캘리포니아에 가족이나 거래처가 있는 사람에게는 은근히 편하다.
내가 생각하는 엘파소는 크게 한 방을 노리는 도시라기보다 기반을 만드는 도시다. 미국에 처음 와서 집값과 생활비에 치이지 않고 돈을 모으고, 영어와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에는 꽤 괜찮다. 화려한 도시는 아니다. 그렇다고 살기 나쁜 도시도 아니다.
오히려 미국에서 살아보니 알겠더라. 사람이 매일 정신없이 뛰어야만 하는 도시보다, 조금 천천히 가도 먹고살 수 있는 도시가 필요한 시기가 분명히 있다. 엘파소는 그런 사람에게 좋은 장소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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