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부영화를 보다 보면 술집에서 두 남자가 서로 싸우다가 "내일 아침에 결투(duel)다!" 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정말 다음 날 권총을 들고 나타난다. 말싸움하다가 푹자고 다음날 아침에 목숨까지 걸고 싸운다고?
이게 궁금해서 결투라는 게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찾아봤다. 결투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었다.
고대에도 분쟁을 일대일 싸움으로 해결하는 일이 있었지만, 일정한 형식을 갖춘 결투의 뿌리 가운데 하나는 중세 유럽의 '재판 결투'에서 찾을 수 있다.
증거가 부족한 사건에서 당사자들이 직접 싸우게 하고 승패로 시비를 가리는 경우가 있었다. 신이 정의로운 사람을 승리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도 깔려 있었다.
이후 유럽에서 결투는 재판보다는 '명예'를 지키는 방식으로 변했다.
귀족이나 장교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면 겁쟁이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상대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거부하면 검이나 권총을 들고 결투하는 문화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바로 총을 뽑는 것은 아니었다.
양쪽에는 '세컨드'라는 입회인이 있었고 시간과 장소, 사용할 무기를 협의했다.
세컨드가 중간에서 사과를 받아내 결투 자체를 취소시키기도 했다.
이 문화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옛날 미국에서는 결투가 합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는 식민지 시대와 건국 초기부터 일부 지역과 사회계층에서 결투가 관습적으로 묵인되거나 실제로 행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가 인정한 합법적인 살인 방법이었던 것은 아니다. 상당수 지역에서 결투는 이미 불법이었고 상대방이 죽으면 살인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건 법과 현실이 따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정치인이나 군인, 변호사 같은 사회 지도층 사이에서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라는 문화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도 실제 결투가 벌어졌다.
배심원이나 지역사회가 결투 참가자에게 동정적인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804년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의 결투다.
미국 부통령까지 지낸 버와 건국의 핵심 인물 해밀턴이 권총을 들고 싸웠고 해밀턴은 총상을 입은 다음 날 사망했다.
그리고 1859년 캘리포니아에서는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다.
현직 연방 상원의원 데이비드 브로더릭과 캘리포니아 대법원장을 지낸 데이비드 테리가 결투를 벌인 것이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Broderick%E2%80%93Terry_duel
요즘으로 치면 거물 정치인과 전직 최고위급 판사가 외진 곳으로 가서 권총으로 승부를 본 셈이다.
두 사람은 원래 친구이자 같은 민주당의 정치적 동료였다. 그러나 노예제 문제로 갈라졌다고 한다.
정치적 갈등은 결국 감정싸움이 됐다. 서로 험한 말을 주고받았고 테리는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해결되지 않자 결국 결투가 결정됐다.
1859년 9월 13일,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레이크 머세드 근처 외진 장소에서 만났다.
웃긴건 경찰이 앞선 결투 시도를 막았는데도 장소를 바꿔 다시 만났다.
사용한 무기는 .58구경 권총이었다. 테리는 이 총에 익숙했고 연습도 했던 반면 브로더릭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브로더릭이 받은 권총은 방아쇠가 매우 민감했다.
결국 브로더릭의 총이 제대로 조준되기 전에 발사돼 총알이 땅으로 향했고 테리의 총알은 브로더릭을 맞혔다. 브로더릭은 사흘 뒤 사망했다.
이 사건은 미국의 마지막 유명 결투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861년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결투를 명예로운 분쟁 해결 방식으로 바라보던 문화는 급속도로 힘을 잃었다.
전쟁 이후에도 일부 결투는 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시대착오적인 행동이 되어갔고 법적인 제재도 더욱 확고해졌다.
현재 미국에서 "서로 합의해서 결투한 것"이라는 변명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총이나 칼로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면 폭행이나 살인 등 일반 형법의 적용을 받는다.
결국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다.
옛날 미국의 결투는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국가가 허가해준 합법적인 총싸움이 아니었다.
불법인데도 사회 일부에서 명예라는 이름으로 계속했던 위험한 관습에 가까웠다.
지금은 정치인이 서로 욕하면 TV에 나와 반박하고 SNS에서 싸우고 심하면 소송을 한다.
한가지 웃기는 건 결투가 사라진 지 150년 가까이 됐는데도 미국 일부 주 헌법에는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켄터키에서는 지금도 공직자가 취임 선서를 하면서 '나는 치명적인 무기를 들고 결투한 적이 없고, 결투 신청을 하거나 받아들인 적도 없으며, 옆에서 도와준 적도 없다'는 취지의 선서를 한다.
2026년에 공직에 취임하는 사람이 1800년대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결투 이야기를 선서문에서 읽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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