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지인과 안부를 주고받다가,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얼마 전에 유언장을 새로 정리해두었다는 말을 지나가듯 꺼냈다.
나이를 물어보니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정도였고, 왜 벌써 그런 걸 준비하냐고 되물었더니 오히려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 더 신기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한국에서는 유언장이라고 하면 흔히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병상에서, 혹은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며 쓰는 문서라고 여기는데, 미국에서 마주한 풍경은 그것과 사뭇 달랐다.
실제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면 이 온도 차이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구체적인 숫자로도 또렷하게 드러난다.
30세 미만 미국인 중에서 유언장을 가진 사람은 다섯 명 중 한 명 정도이고, 65세 이상에서는 그 비율이 네 명 중 세 명 꼴로 훌쩍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전히 나이 든 세대가 압도적으로 많이 준비해두긴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젊은 층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빨라지고 활발해졌다는 점이 이 통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 변화를 만든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로 코로나19 팬데믹을 빼놓을 수 없다.
팬데믹을 겪으며 유언장을 처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답한 18세에서 34세 사이 응답자가 45퍼센트에 달했다고 한다.
같은 기간 젊은 세대의 유언장 보유율은 63퍼센트나 늘었다고 하니, 죽음이라는 게 더 이상 먼 훗날의 일로만 느껴지지 않게 된 셈이다.
심지어 2021년에는 처음으로 18세에서 34세 그룹이 35세에서 54세 그룹보다 유언장을 가진 비율이 더 높아지는, 여러 해 동안 없었던 역전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중년보다 청년이 먼저 서류를 챙겨두는 나라라니, 처음 그 통계를 접했을 때는 살짝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물론 팬데믹 하나만이 이 모든 변화의 이유는 아닐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생애 첫 집을 장만하는 크고 작은 순간들이 유언장을 꺼내 드는 가장 흔한 계기로 꼽힌다.
인생의 무게가 한 단계씩 늘어나는 시점마다 자연스럽게 서류함을 열게 되는 셈인데, 공교롭게도 이런 전환점들이 스무 살 끝자락보다는 대개 서른 전후에 한꺼번에 몰려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무는 이유는 역시 아이 때문이라는 대답이다.
부모 둘 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아이를 누가 맡아 키울지, 그 후견인을 미리 정해두고 싶어서 유언장을 쓴다는 것이다.
재산을 어떻게 나눌지보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더 오래, 더 신중하게 고민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짠해진다.
다만 이유가 이렇게 분명한데도 마음가짐이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성년 자녀를 둔 부모 중에서도 실제로 유언장을 준비해둔 비율은 36퍼센트 정도에 그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유언장이 없는 이유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거창한 사정이 아니라 그저 아직 시간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이렇게 답한 사람이 전체의 셋 중 하나가 넘었다고 한다.
마음은 이미 정해졌는데 서류로 옮기는 그 마지막 한 걸음이 유독 자꾸만 뒤로 미뤄지는 모양이다.
요즘 세대의 자산 구성이 예전과 사뭇 달라진 것도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암호화폐나 온라인 계정,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자산까지 정리해두어야 한다는 감각이 젊은 층 사이에서 점점 커지고 있다.
만질 수 없는 것들일수록 오히려 미리 적어두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릴 수 있다는 걸 이들은 이미 아는 듯하다.
온라인으로 크지 않은 비용에 기본적인 유언장을 만들 수 있는 서비스가 늘어난 것도 젊은 층의 문턱을 낮춘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예전에는 정장을 갖춰 입고 변호사 사무실 문을 두드려야만 시작할 수 있던 일이, 이제는 퇴근 후 편한 차림으로 저녁에 노트북 앞에 앉아 차분히 마칠 수 있는 일이 된 셈이다.
이런 이야기를 두루 듣고 나니 유언장이라는 단어에 대한 내 인식도 조금씩 바뀌어갔다.
죽음을 준비한다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길 마지막 배려를 미리 적어두는 일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서른 즈음에 그런 다짐을 미리 해둔다는 건 삶을 무겁게 여겨서가 아니라,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과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그만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같은 서른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먼 이야기일 수 있고, 그런 온도차 역시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라면 굳이 미루기보다는, 이왕이면 조금 이를 때 이런 마음을 한 번쯤 가만히 종이 위에 정리해보는 쪽에 마음이 기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미리 준비해두는 자세, 그 안에 담긴 다정함이 나이와 상관없이 참 곱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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