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라스에 사는 입장에서 이번 영화 '암살자(들)' 논란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듭니다.
제가 사는 달라스가 어떤 곳입니까.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바로 그 도시입니다.
다운타운 Dealey Plaza를 지나가다 보면 지금도 관광객들이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느니 오스왈드 배후가 있네 없네 아직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 한 편 때문에 한국의 좌우진영이 제대로 붙었습니다.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은 9월 23일 개봉했습니다.
유해진, 박해일, 이민호가 출연하고, 당시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와 기자들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추석 연휴 나흘 동안 140만 명이 넘게 봤고 개봉 11일 만에는 2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논란 때문에 망했다기보다는 일단 흥행에는 불이 제대로 붙은 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핵심은 간단합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장에서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해 총을 쐈고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당시 수사 결과는 문세광의 범행으로 정리됐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총탄과 사건의 의문점을 추적하면서 다른 저격범이나 중앙정보부 개입 가능성 같은 가설까지 극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사건에 관련됐을 가능성을 암시했다고 받아들일 여지가 생기면서 불이 붙은 겁니다.
보수 진영에서는 당연히 발끈했습니다.
"실제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을 사실처럼 느끼게 만드는 건 창작의 자유가 아니라 역사 왜곡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국민의힘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등에서는 강하게 비판했고 상영 중단 요구까지 나왔습니다.
반대편에서는 또 이렇게 봅니다.
"영화가 박정희가 범인이라고 역사책에 써놓은 것도 아니고, 실제 사건에서 출발해 의문과 가설을 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인데 영화에서조차 그런 상상을 못 하느냐"는 겁니다. 제작진 역시 박정희 대통령을 배후로 단정한 영화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허진호 감독도 숨겨진 배후를 밝혀내는 영화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이념전쟁이 붙으면서 이야기가 커졌습니다.

누군가는 좌파 영화라고 하고, 누군가는 보수 세력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합니다.
심한 쪽에서는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말까지 나오고, 반대쪽에서는 과거 권력을 성역화한다는 식으로 맞섭니다.
영화 한 편 보고 나오는데 관객이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현대사 논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실제 관객 반응도 재미있습니다. 개봉 초기 CGV 에그지수는 92%였는데 네이버 네티즌 평점은 10점 만점에 2.4점까지 내려갔습니다. 이게 웃기죠 ㅎㅎ.
같은 영화를 보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숫자가 갈린다는 것 자체가 영화의 완성도만 평가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화 밖으로도 번졌습니다. 배우와 평론가에게 악성 댓글이 몰리고 일부 행사가 취소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제작비 투자에 중국 자본이 들어갔다는 의혹도 제기됐지만 제작사는 중국 자본 유입은 전혀 없었다며 국내 자본으로 제작했다고 반박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달라스에 사는 사람이라 JFK가 자꾸 생각납니다.
1991년 올리버 스톤의 영화 'JFK'도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설명과 다른 암살 공모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해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논란이 정부 기록 공개 문제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이후 미 의회가 JFK 암살 관련 기록 공개를 위한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JFK'와 '암살자(들)'을 똑같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비슷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영화적 상상력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저는 이게 이번 논란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역사영화는 관객은 자막에 "허구입니다"라고 써 있어도 배우가 실제 대통령 옷을 입고 실제 사건을 재현하면 머릿속에서 어느 순간 사실과 영화가 섞입니다.
그래서 창작자에게 자유가 필요한 만큼 관객에게도 "어디까지 확인된 사실이고 어디부터 영화적 가설인가"를 구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마음에 안 드는 해석이 나올 때마다 좌파 영화, 우파 영화, 종북 영화부터 붙이기 시작하면 뭐 일단 마케팅은 성공이죠.
더 재미있는 건 그렇게 싸우는 동안 관객은 계속 들어갔다는 겁니다. 11일 만에 200만 명을 넘었습니다.
다만 200만 명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권 논쟁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전에 이미 관람했다는 분석도 있어서 "논란 덕분에 200만"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결국 이번 논란은 영화 자체의 힘, 역사적 사건 호기심, 유명 배우 출연, 추석 연휴, 그리고 뒤늦게 폭발한 정치 논쟁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달라스에서 Dealey Plaza를 지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암살 사건은 총성이 끝났다고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누가 쐈느냐보다 왜 그랬느냐, 정말 혼자였느냐, 정부 발표를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수십 년을 따라다닙니다.
케네디 암살이 60년 넘게 미국 사람들의 상상력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도 한국 현대사의 아픈 지점에 정치적 기억까지 얹혀 있습니다.
그러니 '암살자(들)'을 둘러싼 진짜 싸움은 영화 한 편의 별점 싸움이 아닐 겁니다.
같은 역사를 놓고도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게 스크린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한꺼번에 튀어나온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논란 자체가 꽤 한국적이라고 봅니다.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인데, 우리 현대사는 아직 엔딩 크레딧이 안 올라간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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