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때 미국에 와서 이제 17년이 넘게 미국에서 살아왔다. 영어도 네이티브 수준이고 나름 친구들도 많다.

대학도 여기 동부지역에서 나왔으니 웬만한 문화 차이는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국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 회의만은 아직도 낯설다.

특히 요즘 내가 다니는 리서치 전문 회사에서 뉴욕의 한 정부기관 일을 맡게 되면서 회의 분위기가 더더욱 익숙하지 않다.

첫 번째로 당황스러운 건 회의에서 나누는 말이 전부 100% 솔직하지 않다는 거다.

다들 웃고 있지만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미국식 'Professional'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직접적으로 "그 아이디어는 별로다"라고 하지 않는다.

아래와 같은 말들을 쓰면서 다양하게 너말은 별로야 라는걸 표현한다 ㅋㅋ

  • That's an interesting perspective.
    실제론 "다른 의견"이라는 의미로, 부정적 뉘앙스를 살짝 감춘 말.

  • Let's circle back to that later.
    당장 채택하기 어렵거나 무시하려는 경우.

  • I see where you're coming from.
    논리엔 동의 안 하지만 이해는 한다는 뉘앙스.

  • That's one way to look at it.
    정중한 "하지만 난 그렇게 안 봐"의 변형.

  • I'm not sure that's the direction we're going.
    그건 우리가 가는 방향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

  • That's something we can think about.
    지금은 아니야.

  • Interesting, though it might not fit our current scope.
    흥미롭지만 현재 진행하기는 무리야.

  • 이런말들이 오고가는 분위기다 보니 회의시간에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기 의견을 흘리는 기술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힘든 건 상사의 의중을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건 그냥 내 성격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회의에서 상사가 원하는 방향을 빠르게 파악하지 못하면 나만 엉뚱한 이야기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특히 이번 정부기관 프로젝트는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보고 라인이 복잡해서, 상사가 표면적으로 말하는 것과 진짜 원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

    '예스맨'이 되어야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실감한다. 무조건 맞장구만 치라는 게 아니라 맞는 타이밍에 맞는 방식으로 동의해야 한다. 그게 눈치와 전략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회의 중에 나누는 잡담도 쉽지 않다.

    미국인들끼리는 정치 얘기나 스포츠, 지역 행사 이야기로 가볍게 분위기를 풀지만, 나는 여전히 그 사이에 끼면 긴장한다. 괜히 잘못된 의견을 말했다가 이미지에 영향을 줄까 봐 조심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조용하면 존재감이 없고 너무 적극적이면 튀어 보인다. 이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피곤하다.

    하지만 다행인 건, 영어 자체는 이제 큰 장벽이 아니라는 거다.

    내가 힘든 건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 뒤에 숨은 의미와 분위기를 읽는 일이다.

    이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직장 문화에 깊이 들어가 봐야 배우는 영역 같다.

    그래서 요즘은 회의 전에 자료를 두 번, 세 번 읽고, 상사가 자주 쓰는 표현과 반응 패턴을 기록해둔다.

    내가 던진 아이디어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유심히 본다.

    결국 회의는 '말하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관찰하는 자리'라는 걸 점점 배우고 있다.

    내가 잘해서 인정받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건 팀이 원하는 방향에 맞춰 기여하는 거다.

    어쩌면 이게 진짜 미국식 회사 생활의 기술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가식적인 표현들이 어색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순간들이 답답하긴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영어는 문제없으니 이제는 나도 이 복잡한 문화의 한가운데서 웃으며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법을 익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