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LA 근처에서 남편과 딸아이 하나 키우며 살고있는 평범한 한국 주부입니다.

오늘은 한국나가면 친구들이 만날 때마다 던지는 그 한마디. "미국 산 지 15년이면 이제 영어는 원어민이지?"

이 환상을 아주 깨부수려고 블로그를 씁니다. 다들 미국 살면 저절로 입이 트일 줄 알고있는 거 좀 부담스럽잖아요.

처음 미국에 올 때만 해도 저는 꽤 자신 있었습니다. 수능 영어 1등급, 토익 800점대.

공항에서 뭐 못 알아들을 게 뭐있어 라고 자신만만했고 잘 할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입국하자마자 들은 "How are you doing today?" 한 문장에 답을 못하고 그대로 얼음땡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머릿속에서는 "I am fine, thank you, and you?" 교과서 기초 문장이 빙빙 돌았는데, 입에서는 "어... 예스." 가 튀어나왔습니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네." 라고 대답한 제 자신을 보며, 이민 생활 쉽지 않겠구나 직감했습니다.

그 이후로 마트 계산대 줄만 서면 괜히 핸드폰 만지고, 장바구니 뒤적이며, 캐셔랑 눈 마주칠까 봐 쓸데없이 바빠집니다.

그런데 영어가 안 느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LA 이쪽은 그냥 제2의 서울입니다. 아침에 H마트 가서 "삼겹살 2파운드만 썰어주세요." 점심엔 북창동 순두부 가서 "해물 맵게. 김치좀 더 주세용" 오후엔 한인 미용실에서 "뿌염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저녁엔 넷플릭스로도 한국 드라마 봅니다.

하루 종일 영어라고는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라떼, 벤티, 플리즈." 한마디가 전부일 때가 허다합니다. 한국에서 영어 학원 다니는 친구들이 저보다 단어 더 많이 압니다.

아이들이 학교 가면서 진짜 고난이 시작됐습니다. PTA 모임, 플레이 데이트. 미국 엄마들 말 속도는 F1 경기 수준입니다. 여기 애 엄마들 자기들끼리 웃으면 저는 타이밍 재다가 눈치껏 "하하." 따라 웃습니다. 왜 웃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우리 아이가 "outgoing" 하다고 해서 나가서 돌아다니기 좋아한다는 뜻인 줄 알고 속으로 걱정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교적이라는 칭찬이더군요. 집 와서 남편설명 듣고 혼자 이불킥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타는 제가 시도 때도 없이 "good for you" 를 남발하는 습관입니다.

무슨 말만 나오면 자동으로 "good for you" 가 튀어나옵니다. 어떤 엄마가 아이가 피아노 콩쿠르 나갔다고 하면 "good for you." 다른 엄마가 남편 승진했다고 하면 "good for you."

그런데 누가 아파서 병원 갔다고 해도 "good for you." .....

갑자기 주변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그제야 그 상황에 전혀 안 어울렸다는 말이구나 알게되죠.

전화는 아직도 공포 영화입니다. 보험 회사에 한번 전화하면, 정체 모를 억양의 영어가 쏟아집니다. "Pardon?" 을 몇 번 외치다 결국 "Sorry, my English is not good." 치트키를 씁니다. 그러면 상대가 갑자기 유치원생 대하듯 천천히 말해줍니다.

그래도 이 생활이 불행하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닙니다. 이제 저는 뻔뻔함이라는 최종 보스를 장착했습니다.

단어 생각 안 나면 손짓, 발짓, K 바디 랭귀지로 밀어붙입니다. 문법 틀려도 신경 안 씁니다. 내 돈 내고 물건 사는데, 내가 당당해야지 누가 대신 해줍니까. 무엇보다 LA에는 저 같은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서툰 영어로 서로 이해하고, 가끔은 한국말로 수다 떨며 하루 피로를 푸는 이 삶이 뭐 대수냐 싶은거죠.

미국 살면 다 영어 잘하는 줄 알았던 분들. 제 이야기 듣고 환상 좀 깨지셨나요.

중요한 건 영어 실력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 가족 먹여 살리고, 아이 키우며, 하루하루 버텨내는 우리 아줌마들의 근성입니다.

"Water" 발음 못 해서 "워러." "와러." 하다가 결국 손가락으로 물 가리키면 어때요. 오늘도 아이들 라이드에, 장 보랴, 정신없는 모든 미주 엄마들. 그리고 한국에서 영어 공부 중인 분들 모두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