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한 사립 고등학교에서 재무담당으로 일한 지 15년이 넘었다.
그 말인즉슨, 매일같이 숫자와 장부, 보고서와 결산표에 파묻혀 살아왔다는 뜻이다.
학교라고 해서 편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사립학교 재무는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등록금 정산, 예산 집행, 급여 회계, 감사 자료 준비, 각종 기부금 관리까지. 일 년 내내 끊임없이 챙길서류가 산더미다.
그런 나에게 아침 커피 한 잔은 ‘선택’이 아니라 ‘의식’에 가깝다.
눈을 뜨자마자 탕비실에서 드립커피를 내리거나, 출근길에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에 들르는 건 내 루틴이다.
커피를 마시는 그 몇 분이, 하루 중 가장 ‘느긋한 시간’일 수도 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10년도 넘게, 나는 커피에 의지해 살아왔다.
그저 피로를 깨우는 게 아니라, 커피 한 잔 마시고 나면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윤곽이 잡히는 느낌이 든다.
문서에 묻혀 있던 수치들이 갑자기 정리되는 기분이랄까.
이게 나만의 착각일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인류 전체가 커피 덕을 본 역사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유럽에서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고방식이 달라졌다는 학설이 있다.
그전까진 유럽의 대표 음료가 맥주나 와인이었는데, 커피라는 자극적인 각성제가 대중화되면서, 생산성과 사고의 방식 자체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카페에서 사람들이 모여 철학과 과학을 논하고, 상업 아이디어를 교환하면서 지식의 흐름이 확장된 배경 중 하나가 커피였다는 해석도 있다.
물론 커피가 모든 변화를 만든 건 아니겠지만, 사람의 정신을 깨우는 자극제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고 본다.
지금 미국에서 사무직으로 살아보면, 그 이야기가 절로 와닿는다.
한국처럼 중간에 담배 한 대 피우고, 커피 타서 한숨 돌리며,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주식 시세 보는 그런 ‘틈’이 거의 없다.
여긴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업무 시간엔 거의 쉬지 않고 돌아간다.
회의 중간에도 랩탑을 놓고 실시간 문서를 확인해야 하고, 이메일 알림은 연달아 들어온다.
틀어진 숫자 하나가 수십 명의 월급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 실수는 절대 금물.
그래서 한순간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막으려면, 커피의 힘이 절실하다.
옆자리 선배는 아예 하루에 커피를 세 번 나눠 마신다.
아침 출근 후 한 번, 오전 미팅 전에 한 번, 오후 피로가 쏟아질 무렵 또 한 번.
나도 점심시간 이후가 되면 솔직히 커피가 없으면 집중이 떨어진다.
그럴 땐 블랙커피 대신 약간의 우유와 시럽이 들어간 라떼로 당도 함께 보충해주면 한두 시간은 문제 없이 버틸 수 있다.
물론 더 센 걸 찾는 사람도 있다. 레드불 or 몬스터.
커피로 안 될 때, 강한 자극이 필요할 때, 주변 몇몇 동료들은 망설임 없이 레드불이나 몬스터를 꺼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건 ‘응급조치’라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는 커피가 훨씬 덜 자극적이고, 위장에도 나은 것 같다.
가끔 후배들이 "선배님은 언제부터 커피에 빠졌어요?"라고 묻곤 한다.
나도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업무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30대 초반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엔 커피 맛을 몰라서 반쯤 억지로 마셨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커피 없이 일을 시작하면 마음이 불안할 정도가 됐다.
그렇게 보면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서, 일종의 리듬 같은 것이다.
일을 시작하는 버튼이자, 집중력의 스위치.
오렌지카운티의 햇살 좋은 아침에도, 흐리고 비 내리는 오후에도, 내 책상 한편엔 항상 커피가 있다.
이건 기호식품이 아니라, 내 일상의 일부이고, 때로는 생존을 위한 연료다.
커피 한 잔 들고 숫자와 씨름하다 보면, 그래도 어느 순간엔 정리가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또 해내며, 나는 오늘도 커피와 함께 재무서를 넘긴다.
결론은 이거다. 미국에서 사무직으로 버티려면, 커피는 필수다. 레드불은 선택이고.
누군가는 안 마시고도 잘 버틴다지만, 나는 자신 없다.
그만큼 커피는 내게 충분한 효과를 주고 있으니까.
오전 11시 커피 = 업데이트
오후 2시 커피 = 오류 복구
오후 4시 커피 = 생존 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