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60을 앞둔 평범한 주부이자 어머니이다. 지금은 필라델피아에서 조용히 살고 있지만, 이민 초기엔 나도 남들처럼 치열하게 살아냈다. 한국에선 대학까지 졸업하고, 한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몇 년간 일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따라 미국 땅을 밟았다. 남편의 형님인 큰 아주버님이 먼저 미국에 유학 후 결혼하여 자리 잡고 있었고, 형제초청으로 우리 부부도 미국이민길에 올라 이곳 필라델피아로 오게 됐다.

처음 10년은 정말 치열했다. 나는 흑인동네에서 손님 상대하며 가발, 엑세서리 팔고, 남편은 홀세일하면서 돌아다니며 매일 바쁘게 일했다. 우리 둘은 밤엔 장사 마감 후 뒷정리하며 딸 학교 생활 물어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영어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울렁증이 있고, 낯선이와 나누는 스몰토크는 여전히 불편하다. 그래도 그렇게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작은 가게 하나 장만하고, 집도 마련했고, 무엇보다도 내 딸을 잘 키워냈다. 그게 내 인생의 가장 큰 자랑이다.

하나뿐인딸은 열심히 공부해 유펜 약대에 들어갔고, 지금은 약사로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있다. 외모로 남들 앞에 내세울 스타일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자기일 잘 챙기는 딱뿌러지는 성격에 경제적으로도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엄마인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럽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시집가서 잘 산다는 여자들 중에 우리 딸보다 나은 사람 얼마나 될까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 자부심과는 별개로, 결혼 얘기만 나오면 나는 속으로 한숨부터 쉰다.

서른다섯. 딸 나이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나이인데, 우리 딸은 아직 혼자다. 연애도 사회생활하면서 몇번 했던 걸로 알고는 있지만, 늘 오래 가지 못했다. 이젠 그런 감정조차 시큰둥해진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아프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건지, 아니면 아직 못 만난 건지. 물어보면 그냥 웃으며 “괜찮아, 엄마” 하고 넘긴다.

딸은 고집이 있는 편이다. 지금도 어릴때부터 친한 한국 친구들과만 어울리며 지낸다. 그러면서도 정작 한국 남자를 데려오는 일은 없다. 미국시민권자라 한국 남자 데려오는 데도 문제는 없겠지만, 요즘 한국 남자들은 예전처럼 미국 오는 걸 선망하지도 않고, 데릴사위처럼 미국에 오고 싶어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내가 보기엔 우리 딸이 오히려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이제는 미국인 사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긴 해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더 유연하게 소통하니까.

가끔 마켓에 나가면 눈에 들어오는 건 물건보다 아이들이다. 손 꼭 잡고 걷는 귀여운 꼬마 손자 손녀 같은 아이들, 교회에선 친구들이 손주 사진 자랑하며 웃고 있을 때 나는 말없이 앉아 있다. 남편은 늘 “지 팔자야. 우린 할 만큼 했잖아”라며 담담해하지만,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자식 인생은 자식 몫이지만, 부모의 걱정은 팔자 소관이 아닌가 싶다.

이따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는 이 아이 하나 잘 키우려고 내 젊음을 다 쏟았는데, 그 아이가 혼자라는 게 이렇게 마음 아플 줄이야…’ 딸아,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존중하고 응원하지만, 네가 누군가와 함께 삶을 나누며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엄마의 작은 바람이란다.

언젠가 네가 손을 잡고 나타나 “엄마, 이 사람이야”라고 말해주면, 그날은 내 인생의 또 다른 보상처럼 느껴질 것 같아.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말없이 저녁상을 차린다. 마음속엔 걱정 하나 얹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