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년대 미국에서 9만명이 얼음장사였다는데 믿을수 있나?
지금은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어 얼음은 아주 흔합니다.
냉장고 문 열면 나오고, 편의점 가면 얼음봉지가 잔뜩 있고, 식당에 가면 얼음을 가득 채운 음료를 내줍니다.
그런데 19세기 미국에서는 이 얼음이 음식 보관을 가능하게 했으며, 동시에 국제무역 상품이기도 했습니다.
믿기 어렵지만, 한때 미국에서는 이 얼음을 자르고, 나르고, 쌓아두고, 배달하는 일에 수만 명이 매달렸습니다.
전성기에는 약 9만 명의 인력과 2만 5천 마리의 말이 이 산업에 동원 됬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얼음 산업의 출발점에는 프레더릭 튜더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카리브해를 여행하며 뜨거운 날씨 속에서 보스턴의 겨울 얼음을 떠올렸다고 전해집니다.그는 23세가 되던 1806년, 실제로 매사추세츠에서 채취한 얼음을 배에 실어 마르티니크로 보내는 실험에 나섭니다.
당시 보스턴 신문도 비웃듯이 이 사실을 다뤘습니다. 열대 지방에 얼음을 팔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첫 항해는 손실로 끝났습니다. 3주 가까운 항해 동안 얼음이 많이 녹았고 판매도 기대만큼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얼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방법만 찾으면 이 사업이 성공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확인한 셈입니다. 튜더가 진짜로 대단했던 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왜 얼음이 보관이 안되고 녹는지 어떻게 하면 버틸 수 있는지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다 찾은 해답이 바로 톱밥, 왕겨 같은 단열재였습니다. 오늘날 아이스박스 원리를 생각하면 쉬워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혁신이었습니다.

얼음 블록을 이런 재료로 단열이 되어서 배에서 녹는 속도를 크게 늦출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톱밥은 제재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부산물이었습니다. 즉, 기술적으로도 맞았고 경제적으로도 성립하는 방식이었던 겁니다. 튜더는 이 단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아이스하우스를 세우고 배 안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얼음을 적재해 손실률을 줄여 나갔습니다.
이 시점부터 얼음 수출은 반복 가능한 사업 모델이 됩니다.
이듬해인 1807년에는 쿠바 하바나로 얼음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열대 지방에서 얼음은 단순히 사치품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감각이었습니다. 차가운 음료, 차갑게 식힌 디저트, 고기와 생선의 신선도 유지라는 개념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생활 방식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호텔, 상류층 사교 문화는 얼음의 혜택을 가장 먼저 체감한 분야였습니다. 하바나에서는 상업용 얼음을 활용한 음료 문화가 빠르게 자리 잡았고, 이 경험은 후일 카리브 칵테일 문화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튜더는 결국 아바나에 얼음 저장고까지 짓습니다. 1815년 세워진 이 얼음창고는 단순한 보관소가 아니라 사업의 판을 바꾼 인프라였습니다. 안정적인 저장이 가능해지자 손실은 크게 줄었고 공급도 훨씬 꾸준해졌습니다.
1830년대에 들어서면 얼음은 카리브해를 넘어서 인도, 중국, 남미까지 가는 글로벌 상품이 됩니다.
특히 1833년 인도 캘커타로 떠난 항해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4개월 가까운 긴 여정 끝에 상당량의 얼음이 실제로 도착했고, 이 항로는 이후 오랫동안 큰 수익을 내는 노선으로 자리잡습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냉장 물류의 원형입니다. '차가움을 유지한 채 장거리 운송한다'는 개념이 이미 19세기 초반에 실험되고 상업화된 것입니다.
당시 더운 지역 사람들에게 미국산 얼음은 그 자체로 신기한 수입품이자 생활 수준을 바꾸는 상품이었습니다.

미국 내부의 생산 시스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겨울이 되면 허드슨강과 뉴잉글랜드 지역의 호수는 거대한 채굴 현장처럼 변했습니다. 얼음이 12인치 이상 두껍게 얼면 작업자들이 표면에 선을 긋고, 특수 톱과 절단 장비를 이용해 얼음을 격자형 블록으로 잘라냈습니다. 잘린 얼음은 말이 끄는 장치와 컨베이어 비슷한 시스템을 통해 저장고로 옮겨졌습니다.
얼음은 그냥 자연에 있는 것을 꺼내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공장식 표준 작업으로 생산되었습니다.
허드슨강 연안에는 약 135개의 대형 아이스하우스가 줄지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상류 허드슨을 따라가면 거의 항상 얼음창고가 시야에 들어왔다고 회고할 정도였습니다. 이 창고들은 이중벽 구조, 두꺼운 단열층, 배수 설계를 갖춘 당시 기준의 첨단 저장시설이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미국의 얼음 산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커집니다.
보스턴 얼음은 1850년 무렵 연간 10만 톤 이상이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미국 얼음 산업 전체는 19세기 말 약 2,800만 달러 규모로 성장합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해도 매우 큰 산업이었고 육류와 생선, 유제품의 장거리 유통을 가능하게 하면서 식품산업 전체를 바꾸는 역할을 했습니다.
뉴욕 가정의 상당수가 얼음 배달 서비스를 이용했고, 도시 생활에서 '아이스맨'은 우유배달부만큼 익숙한 존재가 됩니다.
얼음은 곧 근대 도시의 일상 그 자체였습니다. 여름에도 우유를 마실 수 있게 하고, 고기를 조금 더 오래 보관하게 하며, 병원 치료에도 도움을 주고, 무엇보다 차가운 음료를 대중에게 퍼뜨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산업도 결국 19세기 말부터 기계식 제빙과 냉장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연 얼음의 가격 경쟁력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여전히 자연 얼음이 더 쌌지만 기술이 개선될수록 안정성과 위생 면에서 인공 얼음이 유리해졌습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강과 호수의 수질에 대한 불안도 커졌습니다.

결정타는 20세기 초 가정용 냉장고의 보급이었습니다.
집 안에서 직접 냉기를 유지할 수 있는 시대가 오자, 겨울마다 얼음을 잘라 저장하는 오래된 시스템은 급속도로 낡은 방식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국제 교역량이 줄어들면서 장거리 얼음 무역도 힘을 잃었습니다.
결국 자연 얼음 산업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한때 미국에서 9만 명이 얼음으로 먹고살았다는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냉장고가 없었고, 차갑게 보관하는 능력 자체가 사회를 움직이는 인프라였습니다.
지금은 냉장고에 얼음이 있는게 너무 당연하지만, 한때는 추운 겨울 강에서 얼음을 자르던 노동자들과 그 얼음을 지구 반대편까지 팔아보겠다고 덤볐던 한 사업가의 집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아무 생각 없이 컵에 얼음을 채워 넣는 순간에도, 사실은 그 오래된 산업혁명의 흔적을 아주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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