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 번 넘게 본 영화, Enemy of the State (1998) - Fairfax - 1

이 영화 도대체 몇 번을 본 건지 모르겠다.

1999년도인가  비디오테이프 시절부터 시작해서 DVD, 케이블, 스트리밍까지 매체를 갈아타며 보고 또 본듯.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 거다. 한 번 꽂힌 영화는 그냥 평생 계속 보고 또 보는거다.

Enemy of the State는 처음 봤을 땐 그냥 박진감 넘치는 액션 스릴러였다.

그런데 두세 번째 보면 미국 시스템 이야기 같아서 좀 찝찝해진다. 그리고 어느순간에는 이 영화가 사실은 미래 예언서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먼저 Will Smith 얘기부터 해야겠다. 1998년의 Will Smith는 지금처럼 우주 최고 흥행 보증수표 자리에 막 오를 무렵이었다.

Bad Boys, Independence Day, Men in Black을 연달아 찍고 그 기세 그대로 이 영화에 들어왔다. 그 후 이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는 다들 안다.

Hitch처럼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를 1억 8천만 달러짜리 흥행 대박으로 만들고, I, Robot 같은 어정쩡한 SF를 글로벌 히트로 끌어올렸다.

Tom Cruise나 Mel Gibson이 갈수록 이상한 이미지로 휘청거리고, Tom Hanks와 Brad Pitt가 슬슬 나이 들어 보이기 시작할 때, Smith 혼자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었다. 매력, 위트, 액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신뢰감.

이 영화 초반에 주인공이 아내한테 줄 야한 속옷을 사러 고급 여성복 매장에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별것 아닌 캐릭터 설명용 장면인데, Smith가 들어가는 순간 코미디가 된다.

어색하게 굴면서도 끝까지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그 매력이 이 영화 전체를 끌고 간다.

그래서 천만 달러, 이천만 달러를 줘도 아깝지 않은 거다. 이 사람은 평범한 영화도 볼 만한 영화로 만든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평범하게 살던 변호사가 어느 날 갑자기 국가기관에 찍힌다.

이유는 우연히 정치적 살인이 담긴 영상 하나를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하나 때문에 인생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카드는 막히고, 전화는 털리고, 위치는 추적되고, 가족 관계까지 박살 난다.

그리고 매번 봐도 웃긴 장면이 있다. 주인공이 갑자기 옷을 갈아입고 가지고 있던 물건을 다 던져버리면서 도망 다니는데, 보는 입장에서는 "아니 저걸 왜 지금까지 들고 있었냐" 싶은 순간들이 계속 나온다.

긴박한데도 묘하게 생활감이 흐른다. 게다가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를 외칠 때마다 상황은 점점 더 꼬여간다. "그냥 처음에 그 테이프 버렸으면 끝 아니냐" 같은 생각이 매번 든다. 근데 그게 또 사람 사는 거다. 당황하면 누구나 최선의 선택을 못 한다. 그래서 더 웃기고, 그래서 더 불편하다.

Tony Scott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솔직히 이 감독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화면을 휙휙 돌리고, 컷을 빠르게 자르고, 음악으로 분위기 잡고, 숨 쉴 틈을 안 준다. 한마디로 MTV식 연출이다.

그런데 그 일관성이 또 매력이다. Scott 영화 보러 가면 적어도 무엇을 보게 될지는 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가 평소보다 한 단계 차분해진다.

All the President's Men이나 Marathon Man 같은 70년대 정치 스릴러에 대한 오마주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평범한 사람이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지만 결국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옛날 스타일 말이다.

그래서 드라마 부분은 의외로 차분하게 깔아주고, 액션 시퀀스에서만 Scott 특유의 화려함을 풀어놓는다.

그 균형이 이 영화를 그의 작품 중 가장 보기 편한 스릴러로 만들었다.

내가 열 번 넘게 본 영화, Enemy of the State (1998) - Fairfax - 2

그리고 Gene Hackman이 등장하는 후반부에서 영화는 한 차원 다른 영역으로 올라간다.

Hackman이 연기한 Brill은 누가 봐도 1971년 French Connection의 그 형사 캐릭터에서 그대로 가져온 비틀기다.

더 흥미로운 건 1974년 Coppola의 The Conversation에 나오는 도청 전문가 Harry Caul이다.

영화 속 Brill의 사무실은 Caul의 작업실을 그대로 오마주한 거고, NSA 파일에 들어 있는 Brill의 사진은 The Conversation 시절의 Hackman 사진을 그대로 쓴 거다.

도청과 감시에 대한 미국 영화의 계보가 한 배우를 통해 1974년에서 1998년으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보면,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라는 게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Hackman의 무게감과 Smith의 활기가 부딪히는 그 케미가 이 영화의 진짜 엔진이다.

맞다. Jack Black도 이 영화에 나온다.

지금처럼 주연급은 아니고, 완전 단역으로 나온다. 역할은 정부쪽 통신·장비 관련 도움 주는 인물이다.

비중이 엄청 크진 않은데, 딱 보면 "어? 저 사람 잭 블랙 아니야?"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다. 영화 속 잭 블랙 Black Ops 팀들이 보여준 그 당시 감시 도청 기술들이다.

위성으로 위치 잡고, 통화 내용 듣고, CCTV 끌어와서 동선을 따라간다. 1998년 당시에는 "설마 저게 가능해?"라는 반응이 많았다.

그런데 2013년 Edward Snowden이 NSA의 대규모 감시 프로그램을 폭로한 뒤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기 시작했다. "이거 그냥 영화 아니었네?" 하는 반응이 줄줄이 올라왔다.

1998년에 이런 시나리오를 미리 그려낸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9/11 이후 Patriot Act가 통과되고, 스마트폰이 일상이 되고, 클라우드에 모든 게 저장되는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오히려 덜 과장된 느낌이다.

영화가 픽션을 따라잡은 게 아니라, 현실이 영화를 따라잡은 거다.

마지막에 결국 반전이 있다. 액션 마니아로서 그래서 더 만족스럽다. 그런데 반전이 끝난 뒤에도 여운이 남는다.

단순히 "악당이 응징됐다"로 끝나지 않는다. 개인 프라이버시와 국가 권력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위치, 소비, 검색, 인간관계까지 모두 기록된다. 그걸 생각하고 다시 보면 이 영화는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처음 봤을 때는 액션 스릴러였고, 두 번째는 정치 영화였고, 세 번째부터는 예언서가 됐다.

지금 또 보면 또 다르게 보일 거다. 이게 진짜 좋은 옛날 영화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