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일본 애니메이션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던 시점은 1989년이었다.

그 중심에는 한 작품이 있었다.

바로 "AKIRA"(아키라).

한국 올림픽이 끝난 다음해인 1989년, 일본에서 가져온 레이저디스크로 처음 접한 AKIRA는, 단순히 만화영화를 본다는 차원을 넘어선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 있던 애니메이션은 미국식 디즈니 스타일이었다. 귀엽고 유쾌하며, 아이들을 위한 교훈적인 이야기.

그런데 AKIRA는 모든 게 달랐다. 분위기부터 음울했고, 도시 배경은 혼란스럽고 파괴적이었으며, 캐릭터들은 거칠고 무서웠다.

그 중에서도 폭주족이 네오도쿄 거리를 질주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빨간 전기모터 바이크, 번쩍이는 네온도시, 그리고 거침없는 폭주.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내 안의 무언가가 흔들리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그 세계관의 깊이였다.

핵폭발 이후 재건된 도시 네오도쿄, 정치적 부패, 정부의 음모, 초능력 실험, 종교적 광신…

어떤 하나도 가볍지 않았고, 모든 플롯이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단순히 “애니메이션”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진지했고,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너무도 현실감 있게 다가왔기에, 처음 본 날 밤엔 잠이 오질 않았다.

이게 진짜 일본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그 당시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AKIRA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고, 시선의 전환이었다.

“아, 일본은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나라였구나”라는 인식이 생겼고,

그 뒤로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에반게리온… 다 그 시작점은 AKIRA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AKIRA가 영향을 준 대상은 나만이 아니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워쇼스키 자매, 크리스토퍼 놀란, 기예르모 델 토로, 심지어 칸예 웨스트의 뮤직비디오까지—AKIRA의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말한 아티스트들은 셀 수 없이 많다.

AKIRA 붕괴하는 도시 이미지, 바이크 액션, 초능력의 폭주라는 테마는 헐리우드 사이버펑크 미학의 기본 틀을 바꿔놨다.

또한 80~90년대 미국 대중문화에선 일본이 ‘기술적 강국’으로 묘사되곤 했는데, AKIRA는 그런 일본의 이미지에 미래적 불안과 철학적 질문을 덧입혔다.

이제 일본은 단순히 경제성장만으로 주목받는 나라가 아니라, 사이버 시대의 철학과 감성을 이끌어가는 창작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한 거였다.

개인적으로도 AKIRA는 내 삶의 감수성에 큰 영향을 줬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은 애들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이야기의 형식보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와 미학에 더 주목하는 사람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내 머릿속의 미래 도시는 여전히 네오도쿄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2025년인 지금,  AKIRA는 여전히 고전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작품이다.

디스토피아, 정부의 통제, 과학의 윤리적 한계…

우리가 지금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이슈가 이미 그 속에 담겨 있었던 거다.

단지 나 하나만의 일이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겪은 ‘AKIRA 쇼크’였던 듯.

AKIRA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문명과 인간의 미래를 묻는 하나의 예언서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