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에이에 처음 온 사람들은 하늘로 쭉쭉 솟은 팜트리가 만든, “여기가 바로 캘리포니아구나!” 싶은 엽서 같은 풍경에 한 번 반합니다. 그런데 요즘 현지 언론과 도시계획가들 사이에서는 ‘팜트리 무용론’이 심심치 않게 거론돼요. 왜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다섯 가지 각도에서 정리해 볼게요.
상징이지만 토착은 아니다
LA 거리 대부분을 채운 멕시코 팬팜·카나리아섬 데이트팜 등은 사실 토착종이 아닙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가져오고 1930년대 올림픽 준비 때 집중 식재되면서 ‘남국 이미지’가 덧칠된 결과죠. 토종이라 할 만한 건 모하비사막 남부에 자생하는 워싱토니아 팬팜 정도뿐이라, 생태계 연결성은 의외로 낮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그늘도 물 절약도 못 해낸다
여름마다 40도에 육박하는 열섬(Heat‑island) 도시에서, 나무라면 넓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도보 온도를 낮춰 줘야 하죠. 문제는 팜트리가 몸집은 큰데 그림자는 작다는 것. 게다가 어린 시절엔 물을 꽤 많이 먹기 때문에, 극심한 가뭄을 겪은 LA에서는 “물 쓰는 기둥”이라는 불만까지 나옵니다. 도시 임업 전문가는 “새로 심을 거라면 차라리 활엽수·사막형 그늘나무가 기후 적응에 유리하다”고 말해요.
화재와 해충에 취약한 ‘타워형 연료’
메마른 마른잎이 층층이 달린 팜트리는 산불이 번질 때 ‘연료 사다리(fuel ladder)’ 역할을 합니다. 2024‑25년 잇따른 대형 산불에서도 바짝 마른 팜트리 수십 그루가 불씨를 상공으로 날려 확산을 키웠다는 보고가 있었죠. 여기에 붉은왕대롱충·균류 같은 침입 해충까지 겹치며 수명이 끝난 개체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시 예산엔 ‘밑 빠진 독’
현재 거리·공원에 남은 팜트리는 약 10만 그루로 추산되는데, 고사목을 베어내고 ‘아이콘 유지용’으로 일부만 교체해도 연간 수백만 달러가 듭니다. LA 시는 이미 “죽는 팜은 재식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라이브오크·데저트 윌로 같은 토종 그늘나무 식재 사업에 예산을 돌리고 있어요. 2035년경이면 도심 팜트리는 절반 이하로 줄 거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그래도 사라질 순 없는 ‘문화 자산’
할리우드 백드롭, 해변 석양, 팜트리 라인 거리 풍경은 LA 브랜드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관광 업계와 일부 주민은 “모두 없애기보단 상징적 구간만이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절충안을 내놓고 있죠. 실제로 시는 할리우드·윌셔대로 등 대표 가로수 구간엔 병해충 저항성이 높은 품종을 선별해 “기념 팜 가로수”로 유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바꿔 말해, 팜트리는 “LA를 세상에 알린 인플루언서” 역할을 마친 뒤, 이제는 물러날 때가 온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