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마흔하나. 대학교 동창과 같이배우기 시작한 HVAC 기술자로 15년을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냈다.
HVAC 일은 회사에 일이 계속 들어와서 많았는데, 내 사업이 아니다보니 모이는 돈도 별로이고 가족들과의 삶도 없었다.
그렇게 15년을 열심히 살아오긴 했지만 실은 매일매일 무료하게 루틴이 된 듯 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어느 날, 4살 아들이 퇴근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기분이 안좋아?"
내게는 LA에서 함께 땀 흘리던 멕시칸 동료 기사 마이크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팀으로 수없이 많은 옥상과 기계실을 넘나들며 일했고,
일보다 아이들 키우는 얘기를 더 많이 나눴다.
어느 날 마이크 장인이 돌아가셔서 혼자된 장모님과 같이 살려고 산안토니오로 이사간다고 말했다.
처음엔 친한 동료가 타주로 간다고 해서 가슴이 약간 답답하고 떠나는 그의 현실이 아쉬웠다.
하지만 3개월쯤 지난 어느 저녁,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야, 여기 살아보니 정말 괜찮다. 회사 자리도 하나 비는데, 네가 오면 내가 추천 넣어줄게."
그 한마디가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 LA라는 도시에서 가족을 지키며 산다는 게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지.
산안토니오에 잡 인터뷰 하러 비행기 타고와서 처음 본 건,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아파트 대신 땅 위에 지어진 단독주택들이었다.
LA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에 묘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진짜 미국적인 모습이 이런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일자리 인터뷰 후 취업이 결정되자, 나는 이곳에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LA를 떠나 텍사스로… 내 인생을 다시 숨 쉬게 한 1,383마일
와이프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아이들 교육환경과 우리능력을 넘어가는 내집마련 이야기에 설득되어 같이 이주 준비를 했다.
나 혼자 산안토니오에 와서 일을 시작하고 LA 에 있는 아이들과 와이프는 이사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2주 일하고 LA에 이삼일 정도 돌아가서 같이 이사준비를 챙기는 생활을 무려 석달을 했다.
내가 텍사스 산안토니오에 일 시작한지 4개월이 되던 때 우리식구는 주변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LA를 떠나 텍사스로 향했다.
그때 운전한 1,383마일이 나를 숨쉬게 해줄 공간으로 다다간다는 기대감에 피곤한줄도 모르고 3일 내내 운전하던 기억에 남는다.
이주한 후 1년만에 마련한 우리만의 공간
이곳에서 아파트 살면서 꼼꼼히 조사한 후 내집마련을 하였고, 이 집은 우리 가족의 안식처가 됐다.
아내는 웃음을 되찾았고, 아이들은 집 안에서 뛰지 않아도 되는 뒷뜰이 있는 환경이 생겼다.
우리 집은 루프 1604와 I-10 근처의 신축 커뮤니티.
넓은 차도, 정돈된 거리, 밤에도 조용한 동네. 이웃들도 상냥하고 친절하다.
이런 곳에 이런집이 33만 불이라니, 모기지 내는돈이 LA 아파트 2베드 렌트보다도 낮은 가격이다.
수입은 LA보다 10% 정도 줄었다.
그렇지만 LA의 물가를 생각하면, 여기가 훨씬 살 만하다.
차 보험, 전기세, 외식비, 애들 용품까지 다 내려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멕시칸 동료의 추천으로 시작한 새 일터는 인간적인 곳이었다.
정시에 퇴근하고, 주말은 가족과 보낼 수 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숨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 날씨는 확실히 덥지만, 내가 하는일로 우리가족이 먹고살고, 더울땐 시원하게 추울땐 따뜻하게 살 고객들 생각에 일손이 쉴 틈이없다.
다시, 숨 쉬는 삶으로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아들은 뒷마당에서 강아지와 함께 공놀이를 하고 있고
아내는 식탁 위에 오븐에서 막 구운 쿠키를 간식거리로 준비하고있다.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리모델한 거실에서, 맥주 한 캔을 따고 있다.
나는 돈을 조금 덜 벌지만, 웃음을 더 많이 짓는다.
내 삶은 더 단순해졌지만, 더 풍성해졌다.
만약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LA라는 막막한 도시에서 ‘가족 vs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내가 감히 말하고 싶다.
“좋은 동료 하나, 용기 한 번이면, 인생은 다시 숨을 쉽니다.”
나는 LA를 떠나, 산안토니오에서 다시 ‘가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