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에서 10년 넘게 살다가 와이프 직장발령으로 재작년에 덴버로 이사를 오게 됐다.

덴버에서도 이름난 좋은 지역이고, 학군도 나쁘지 않아서 공립보내도 되고.. 무엇보다 여기는 여름이 길지 않아서 OK하고 왔다. 그리고 산이 거의 없는 텍사스에 비해 이곳은 록키산맥의 높은 산세가 유명하다 보니 뒷마당에서 보이는 주변 경치가 정말 좋다.

이사와서 산이 둘러싼 경치를 그냥 맥주마시며 보다가, 와이프의 제안대로 달라스에서 가져온 그릴을 청소하고 고기를 구워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달라스 살때와는 달리 바베큐의 진짜 재미는 덴버로 와서야 알게 됐다.

주말이면 지인들 불러서 뒷마당에서 고기 굽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나 할까.

처음엔 그냥 소소하게 시작했다. 코스트코에서 햄버거 패티 몇 개, 닭다리 몇 조각, 그리고 치즈 소세지 몇 팩 사다가 구워보기 시작했다.

뭐 굽는 건 뭐 별 거 없다 생각했는데, 아니 이게 웬걸.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 소세지 냄새가 사람 미치게 만든다.

거기에 흰쌀밥에 상추하고 고추장, 그리고 푹익은 배추김치나 총각김치하고 환상의 궁합이다.


특히 스테이크 부위나 닭다리에서 나오는 스모키한 향은 장난아니다.

고기의 지방이 챠콜에 튀어 녹을때...

엄청난 마성을 지닌 냄세를 사방에 뿌려대다 보니 (킁킁 거리다가 배고파 진다) 이웃들도 지나가다 우리집으로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재미있는 건, 고기만 먹으면 뭔가 2% 부족한데, 거기 살짝 시원한 맥주나 톡 쏘는 탄산 음료 한 잔 곁들이면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거다.

마치 누가 뒤에서 “이게 진짜 바베큐의 정석이야!” 하고 외쳐주는 듯한 기분. 어느 날은 와이프 동료직원이 "왜 이렇게 고기랑 맥주 조합이 좋을까?" 묻길래, 나도 궁금해서 좀 찾아봤다.

알고 보니 꽤 과학적인 이유가 있더라. 고기를 구울 때 생기는 ‘마이야르 반응’이라는게 단백질과 당이 고온에서 만나면서 생기는 향기로운 화학 작용인데, 고기 특유의 감칠맛과 풍미가 이 반응 덕분이다. 그런데 이 기름지고 짭조름한 풍미를 입 안에서 더 잘 퍼지게 해주는 게 바로 '차가운 탄산'이다.

탄산은 입안 지방을 씻어주고, 거기에 톡 쏘는 청량감이 더해져 미각을 리셋시켜주기 때문에 고기의 풍미를 한층 더 또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탄산이나 맥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바베큐의 ‘찰떡 궁합 파트너’라는 말.


게다가 우리는 생각보다 ‘불 앞에 모이는 본능’이 강하다.

우리 인간은 불과 천년전만 해도 사냥한 고기를 불에 구워 먹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 본능이 아직도 DNA에 깊게 각인되어 남아있는지, 바베큐 파티만 하면 다들 웃음이 많아진다.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고기 한 점에 맥주 한 잔만 있으면 금세 친구가 되고, "이 집 양념이 뭐야?" 같은 질문이 오가면서 대화가 술술 풀린다.

덴버는 여름도 깔끔하고 하늘이 쨍해서 바베큐 하기 딱 좋은 도시다.

낮에 볕은 다소 뜨겁지만 그늘에선 시원하고, 저녁이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그릴 앞에서 맥주 들이키기 딱 좋다. 햇살이 지고 조명이 켜진 뒷마당에서 지글지글 굽히는 고기, 고소한 향기에 웃음소리 섞이고, 뿌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갈 땐,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구나 싶다.

요즘은 고기 굽는 실력도 제법 늘었다. 소세지에 칼집을 넣어 겉바속촉 굽는 건 기본이고, 닭다리엔 미리 간장과 레몬즙 베이스로 마리네이드 해서 속까지 간이 배도록 만든다. 심지어 “오늘은 스모크 치킨으로 간다”며 나무칩 넣고 훈연까지 시도하는 날도 있다. 이런 날은 꼭 지인이 “너 바베큐 유튜브 해볼래?” 하고 농담을 던진다.

이제는 덴버 이사하고 나서 생긴 내 인생의 소확행, 아니 ‘소중한 불맛의 시간’이라고 할까.

내 인생의 바베큐는 그렇게 어느 여름날 시작돼서, 지인들과 함께 고기 굽고, 맥주 마시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 속에서 한껏 익어가고 있다.

인생 뭐 있나, 건강하게 살면서 잘 먹고, 주변사람들과 잘 지내면 그게 바로 행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