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은 사귄지 반년정도 되어가는 여자친구를 픽업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고, 나는 차를 몰고 그녀의 집으로 갔었다.
Bundy Dr. 에 살던 여친 집에는 이미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다. 올 때마다 깔끔했다. 정돈된 책상, 반듯하게 정리된 침대시트.
그런데 문제는 도착하기 직전에 갑자기 배가 꾸륵거리더니 화장실이 너무 급해진 거다.
차에서 버틸 수준이 아니었다. 뭘 따질 여유도 없이 그냥 "나 잠깐만 들어가도 돼?" 하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간이 멈췄다. 머릿속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눈만 끔뻑였다.
방 안이 ㅎㅎ 그러니까, 내가 알던 그 방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옷이 사방 널려 있었다. 어제 입었을 법한 옷, 지난주에 입었을 법한 옷, 계절이 지났을지도 모르는 옷들이 뒤섞여 층을 이루고 있었다.
먹다 만 햄버거 포장지, 반쯤 남은 음료수병, 찢어진 택배 박스, 화장품 샘플들, 종이 쪼가리, 그리고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까지.
침대는 있긴 한데 침대라기보다는 '이불로 덮어놓은 더미'에 가까웠다. 책상 위는 지층처럼 쌓여 있었고 그 위에 또 뭔가가 올라가 있었다.
내가 본 적 있던 그 깔끔한 공간이, 실은 연출된 무대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손님이 올 때마다 그녀는 그 공간을 임시로 복원하고 있었던 거다. 마치 무대 세트처럼.
그때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아... 이건 일부러 치운 모습만 보여줬던 거구나."
이상하게도 웃음이 먼저 나왔다. 당황하면 웃음이 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화장실로 걸어가면서도 "와, 이건 레벨이 다르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야 나는 그날의 장면이 단순한 '지저분함'이 아니었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방이라는 공간은 생각보다 많은 걸 말해준다.
사람들은 대개 방이 어질러져 있으면 "게으르네" 한마디로 끝내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방의 상태는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거의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그날의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면, 몇 가지가 보인다.
에너지의 문제다. 정리라는 건 생각보다 두뇌가 많이 필요한 작업이다.
이걸 버릴지 말지, 어디에 둘지, 어떻게 분류할지 매 순간 판단해야 한다. 머리가 이미 다른 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정리가 사치다.
우울하거나 번아웃이 온 사람은 옷 한 벌을 옷장에 거는 것조차 버겁다.
"나중에 해야지."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보면, 어느 순간 방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상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또 에너지가 빠진다. 악순환이다.
그리고 사람 자체의 기준 자체가 다른 경우다. 어떤 사람은 눈에 물건이 잔뜩 보여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대신 냄새나 위생에는 예민하다. 겉보기엔 엉망인데, 본인은 그 공간에서 평온하다.
이건 성격의 차이고, 감각의 차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좀 웃긴데 진짜다. 완벽주의.
"어차피 치울 거면 제대로 치워야지"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시작조차 못 하는 경우. 결국 방은 계속 그대로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군가의 방을 볼 때 조금 다른 시선을 갖게 됐다.
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 같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잘 정돈된 방이라고 해서 삶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갑자기 무너진 방은 대체로 그 사람도 어디선가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녀의 방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소엔 괜찮은 척, 손님이 오면 깔끔한 척, 그렇게 유지해오던 것들이 어느 순간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리고 정리할 힘이 사라진 뒤에도, 나한테는 괜찮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사람 마음이니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 가장 덜 아픈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거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내가 본 건 방이 아니라 그녀의 피로였던 것 같다.
옷더미 아래 깔려 있던 건 물건이 아니라, 아마 그녀가 감당하고 있던 하루하루였을 거다.
그래서 이제는 방이 엉망인 사람을 보면 예전처럼 판단부터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묻고 싶어진다. "요즘 많이 지쳤어?" "머리가 너무 복잡해?" 정리는 체력보다 정신력의 싸움이다.
마음이 무너지면 공간도 같이 무너진다. 반대로, 공간을 조금씩 정리하다 보면 마음도 천천히 가라앉는다.
해결 방법은 완벽하게 치우려 하지 말고, 그냥 하나만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게임하듯이 하루에 몇 % 씩 치우는 습관만 들여도, 1주일도 안되어서 방은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웃기고, 여전히 짠하다.
화장실이 급해서 들어갔다가 인생에 대한 작은 깨달음 하나를 들고 나온 날.
사람의 겉모습 뒤에 어떤 풍경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그 풍경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느낀 날이었다.
노래 가사에 엉덩이는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이 있던데 내갈 볼때 방은 거짓말을 못 한다. 사람은 해도, 방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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