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옥수수밭에 들어가 길을 잃는 일이 돈을 내고 하는 놀이가 됐다는 것, 처음엔 참 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주말이면 동네 농장 입구마다 corn maze 간판이 섭니다. 호박 더미 옆에 건초 수레가 서 있고, 아이들은 지도 한 장을 쥐고 누런 옥수숫대 사이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 풍경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게 언제부터 미국 가을의 얼굴이 됐을까 하고요.
저는 막연히 개척 시대부터 내려온 농촌 풍습이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옥수수밭 미로는 1993년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젊은 전통인 셈입니다.
시작한 사람은 농부가 아니라 쇼 비즈니스 쪽 사람이었습니다. 브로드웨이와 슈퍼볼 하프타임 쇼 같은 무대를 기획하던 돈 프랜츠라는 연출가입니다.
그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진 옥수수밭을 내려다보다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저 넓은 밭에 그림을 새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그는 영국의 미로 디자이너 에이드리언 피셔와 손을 잡았습니다. 영국은 궁정 정원의 산울타리 미로가 수백 년 이어져 온 나라이니, 제대로 된 짝을 찾은 셈입니다. 돌과 나무로 만들던 미로를 한철 자라는 곡식으로 옮겨 온 발상이 참 대담했습니다.
두 사람은 펜실베이니아의 한 대학 부지에서 3에이커 남짓한 밭을 골랐습니다. 이름은 The Amazing Maize Maze였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밭 전체가 거대한 공룡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별명은 Cornelius the Cobasaurus, 옥수수 속대를 뜻하는 cob을 넣은 말장난입니다.
첫 미로는 지금처럼 정교한 장비에 기대지 않았습니다. 격자로 좌표를 나누고 옥수숫대를 손으로 뽑아 길을 냈다고 하니, 그 수고가 짐작이 갑니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도면을 들고 밭고랑을 오갔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 살아 있는 퍼즐은 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르며 전국적인 화제가 됐습니다. 미국 전역의 눈길이 시골 옥수수밭 하나로 쏠렸습니다. 한철 지나면 베어 버릴 밭 하나가 그렇게 큰 이야깃거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불씨를 들판 전체로 옮긴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유타에 살던 브렛 허브스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소식을 보고 1996년에 땅을 빌려 직접 미로를 만들었습니다. 회사 측 기록에 따르면 3주 만에 18,000명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성공으로 미로 설계 회사 The MAiZE가 생겼습니다. 지금은 미국과 캐나다 곳곳의 농장에 해마다 디자인을 공급하는 업계 최대 컨설팅 회사가 됐습니다.
여기서 제가 무릎을 친 대목이 있습니다. 옥수수밭 미로는 낭만이 아니라 농가의 생존 전략이었다는 점입니다.
곡물 값은 농부가 정할 수 없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값이 떨어지면 손에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밭에 길을 내고 입장료를 받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옥수수를 파는 게 아니라 가을 하루의 경험을 파는 것이지요.
미국 사람들은 이걸 agritourism이라고 부릅니다. 호박 따기, 건초 마차, 사과 사이다 도넛이 모두 한 묶음으로 따라 붙었습니다. 미로가 손님을 끌어오면, 나머지가 그 손님의 지갑을 여는 구조입니다.
저는 여기서 어릴 적 고향 들판이 떠올랐습니다. 추수 끝난 논에서 볏단 사이를 뛰어다니며 숨바꼭질하던 기억입니다.
그때 그 놀이에는 입장료가 없었습니다. 그저 들판이 우리 것이었고, 해가 지면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길잡이였습니다.
미국은 그 소박한 놀이를 설계하고 이름 붙이고 상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조금 야박하다 싶었는데, 가만 따져 보니 생각을 고쳐먹게 됐습니다.
땅을 지키려는 농가가 스스로 찾아낸 방법이라면 오히려 박수 칠 일입니다. 정부 보조금만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건강한 해법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자 이 새로운 놀이가 전통의 옷을 입었습니다. 1993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 자기 아이 손을 잡고 미로에 들어갑니다. 서른 해 남짓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전통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 한 번 시작하고, 사람들이 해마다 돌아오면 그게 곧 전통이 됩니다.
저도 올가을 가까운 농장 미로에 한번 들어가 볼 생각입니다. 길을 잃는 게 목적인 곳에서 길을 잃어 보는 것, 이 나이에 해 볼 만한 사치입니다.
혹시 가실 분들은 운영 여부와 시간을 미리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농장마다 해마다 사정이 달라 문을 닫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날이 저물면 안에서 방향 감각을 잃기 쉬우니 해 있을 때 들어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미로 한가운데서 잠시 멈춰 서면, 옥수숫대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가 들릴 겁니다. 그 소리는 1993년에도, 우리 고향 들판에서도 똑같았을 겁니다.

별밤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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