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덜터덜 지친몸으로 퇴근해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는 건 딱 하나다.

오직 내 거실 구석에 자리 잡은, 오래되고 후줄근한 회색 카우치 하나.

가운데는 이미 엉덩이 자국으로 푹 꺼졌고, 색도 여기저기 바래서 오래된 티가 확실하게 난다.

피곤해서 그대로 철푸덕하고 카우치에 몸을 던지면 그냥 마음이 스르르 놓인다.

누가 뭐라 하지 않고, 뭘 기대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받아주는 존재.

회사에선 늘 실적이 어쩌고, 성과가 어쩌고.

친구들 만나도 "요즘 어때?" "그냥 뭐, 똑같지" 이런 대화만 반복된다.

솔직한 속내? 그런 건 얘기할 틈도 없고, 분위기도 안 돼.

다들 바빠, 다들 자기 살기 바쁘거든.

그런데 이 카우치는 다르다.

내가 멍하니 앉아 있어도, 누워서 핸드폰만 들여다봐도 아무 말 안 한다. 눈치도 안 준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이 카우치 위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이사할 때, 한 번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이참에 새로 바꾸자, 요즘 유행하는 블랙 레더 소파 어때? 좀 모던한 느낌으로?

근데 매장 돌아다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

'이 카우치를 버리는 건, 그냥 가구 하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내 지난 몇 년을 통째로 던져버리는 거 아닐까?'

이 위에서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고, 아파서 계속 누워있던 날도 있었다.

여자친구랑 싸우고 혼자 술마시던 자리도 여기였고,

첫 출근 전날 설레서 밤새 뒤척였던 것도 여기였고,

회사 그만두고 멍해진 채 하루 종일 앉아 있던 날도 여기였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이놈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느낌이다.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어떤 마음인지, 말 안 해도 다 아는 듯한.

가끔 친구들이 와서 "야 이거 좀 바꿔라, 다 삭았잖아" 하면 웃고 넘기긴 하는데, 속으론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마다 하나쯤은 자기를 이해해주는 존재가 있잖아.

누군가는 강아지일 수도 있고, 기타일 수도 있고, 오래된 배우자일 수도 있고.

나한텐 그게 이 카우치다.

오늘도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면 신발부터 벗고, 그대로 철푸덕.

그럼 이 녀석이 조용히 속삭인다.

"그래, 수고했어. 좀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