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산 지도 어언 30년이 넘어가고 나이도 어느새 60을 넘기다 보니, 요즘은 젊을 때는 별로 생각도 안 하던 한국에서 소싯적에 배운 단어들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기신이라는 말입니다. 정기신은 한자로 正氣神 이라고 씁니다.

正은 바를 정으로, 치우치지 않고 곧다는 뜻을 담고 있고, 氣는 기운 기로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神은 정신 신으로 생각과 판단,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세 글자를 합치면 바른 기운과 맑은 정신이라는 뜻이 됩니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건강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몸의 기운과 마음의 정신이 함께 바로 서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단어를 일상에서 누가 쓰겠습니까. 미국에서는 더더욱 들을 일도 없고 요즘 한국 젊은 세대도 뜻을 잘 모를 말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이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 말이 참 묘하게 와 닿습니다. 정기신을 한자로 풀어보면 바를 정, 기운 기, 정신 신인데, 결국 사람의 중심이 바르게 서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젊을 때는 체력으로 버티고, 성질로 밀어붙이고, 밤새워 일해도 다음 날 멀쩡한 척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60이 되니 그게 안 됩니다.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고 마음도 금방 흔들립니다.


이럴 때 옛사람들이 왜 몸과 마음을 따로 보지 않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몸이 무너지면 생각이 흐트러지고, 생각이 흔들리면 판단이 틀어집니다. 판단이 틀어지면 괜히 말 한마디에 욱하고, 이메일 한 통에도 기분이 상합니다. 이게 바로 정기신이 흐트러진 상태라는 걸 요즘 들어 체감합니다.

미국 사회는 빠르고, 효율을 중시하고, 나이를 잘 봐주지 않습니다. 60세 남성이라고 해서 알아서 배려해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자기 페이스를 못 잡으면 휘둘리기 쉽습니다.

옛날에는 나라가 어지러우면 정기신이 무너졌다고 했는데, 요즘 미국 돌아가는 꼴을 보며 혼자서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뉴스만 켜도 자극적인 이야기뿐이고 SNS는 요즘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자꾸 긁어댑니다.

이럴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명상, 루틴, 자기관리라는 것도 결국은 이름만 바뀐 정기신 관리입니다. 잠 제대로 자고, 괜히 과식하지 않고, 술 줄이고, 매일 걷고, 감정이 올라올 때 한 박자 쉬는것이 다 정기신을 세우는 생활 습관입니다.

대단한 철학도 아니고 책 한 권 더 읽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흔들릴 상황에서 덜 흔들리는 힘, 남 말에 바로 반응하지 않고 한번 걸러내는 여유, 그게 정기신입니다.

나이 먹으니 인생에서 중요한 건 더 많이 가지는 게 아니라, 덜 흔들리는 거라는 걸 알겠습니다.

결국 정기신이란 거창한 옛말이 아니라 이민 와서 인생 굴곡 몇 번 겪고 나서야 알게 되는 삶의 중심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