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오래된 가요를 듣다 보면 참 희한한 노래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1940년대 후반에 발표된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오래된 유행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요즘 노래와는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 인생이 괴롭다고 하소연하거나, 세상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즐거운 일을 노래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노래일까요?
놀랍게도 그냥 경주의 달밤을 바라보는 노래입니다.
신라의 옛 도읍지에 달이 뜨고,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풍경을 바라봅니다.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곳에 살았던 옛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그게 거의 전부입니다. 가사 내용만 보면 요즘 기준으로 참 이상한 노래입니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신라의 밤이여 화랑도의 추억이 새롭고나 푸른 강물 흐르건만 종소리는 끝이 없네 화려한 천년사직 간 곳을 더듬으며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노래를 아~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고나 대궐 뒤에 숲 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맛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대중가요라면 적어도 사랑이나 이별, 기쁨이나 슬픔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노래는 그런 감정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물론 노래에 애수와 낭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굳세어라 금순아로 유명한 가수 현인의 창법은 이 노래를 또 다른 수준으로 느끼게 해줍니다.
다만 그 감정을 자신의 개인적인 사연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생각해 보면 현대 대중음악은 대부분 '나'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나를 떠났다. 나는 외롭다. 나는 성공하고 싶다. 나는 상처받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사랑 노래든 힙합이든 발라드든 결국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달밤'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한발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풍경을 앞세웁니다.
달빛 아래 놓인 오래된 도시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그 긴 시간 속에 잠시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이런 태도를 관조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고,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외치지도 않은 채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가 등장한 시대입니다.
1940년대 후반의 한국은 결코 평화롭고 풍요로운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습니다. 몇 년 뒤에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까지 찾아옵니다.
그런 시대에 만들어진 대중가요가 세상의 고통을 직접 이야기하는 대신 천 년 전 신라의 달밤을 노래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게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오래된 역사와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 자체가 위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반대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켜면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사랑을 자랑하고, 누군가는 이별을 이야기하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부와 능력을 과시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의 관심을 끌어야 하니 감정 표현은 강해지고 메시지는 직접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 오래된 도시의 달빛을 바라보는 노래라니요.
요즘 이런 가사를 신인 가수가 음반회사에 가져간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요? 사랑 이야기라도 좀 넣어보시죠."
아마 이런 말을 듣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이런 노래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젊었을 때는 음악을 들으면서 사랑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꼭 모든 노래가 내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달을 바라보아도 좋고, 오래된 도시를 떠올려도 좋습니다.
천 년 전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도 지금 우리처럼 밤하늘의 달을 보았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신라의 달밤'이 낯설게 들리는 이유는 노래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성공도, 분노도, 자기 자랑도 없는 노래.
무언가를 주장하지도 않고, 듣는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달빛 아래 오래된 도시 하나를 조용히 펼쳐놓습니다.
뭐 이런 가요가 다 있나 싶다가도, 듣고 나면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옛날 노래가 아니라, 미국에 이민와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세상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었던 마음의 여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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