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LA 그리고 피닉스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사람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서부로 이민 온 한인들이 하나둘 모여 정착할 무렵 나는 아직 학생이었지만, 그 시대 분위기를 또렷이 기억한다.

당시엔 한국계 이민자나 멕시코계 이민자나 모두가 생존을 위해 바쁘게 뛰던 시절이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열심히 일하면 길이 열린다”는 믿음이었다.

그때 한인들과 멕시칸 이민자들은 LA 다운타운 자바시장에서 재봉틀을 돌리고, 작은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홀세일, 리테일 매장에서 물건을 정리하며 함께 일했다. 이민 1세대로서 서로 문화는 달랐지만, ‘고된 노동’과 ‘불안정한 신분’, ‘낮은 임금’이라는 공통의 현실 속에서 자연스레 동지 의식이 생겼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같은 작업장에서 땀 흘리며 묵묵히 일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특히 20여년전부터 내가 이주해 온 이곳 피닉스에서는 멕시코계 커뮤니티가 일찍부터 형성되었고, 한인들도 틈틈이 그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한인 사장님은 멕시칸 직원과 30년 넘게 함께 일했고, 그 직원의 자녀는 대학을 졸업한 뒤 가족 레스토랑을 프랜차이즈로 키우고 있다. 그걸 보며 감탄도 했지만, 솔직히 약간의 시기심도 느꼈다. 우리는 여전히 리커스토어나 드라이클리닝을 지키는 반면, 그들은 빠르게 미국 소비자 시장을 이해하고 문화 비즈니스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멕시칸 이민자들은 ‘저임금 노동자’ 이미지를 벗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내세우며 미국 시장에 자리를 넓히고 있다. 음식은 물론이고 음악, 의상, 축제까지—이전에는 단순히 ‘이국적인 구경거리’로 소비되던 것들이 이제는 자부심 있는 브랜드로 재탄생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라틴 감성으로 SNS 마케팅, 콘텐츠 브랜딩에 능숙하고, 미국 소비 트렌드 안에 자신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이걸 보며 나는 확실히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한인들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긴 하다. 특히 2세 이후 세대들 중 일부는 한국 문화를 알리겠다며 음식이나 케이팝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한식당을 몇 군데 오픈하거나, “한국 치킨 맛있다”는 홍보 정도로는 넓은 미국 시장에서 파급력을 갖기 어렵다.

문화 전도의 출발은 좋지만, 너무 음식에만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정작 더 중요한 건 경제 인프라다.
부동산, 헬스케어, 자동차 딜러망 같은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국 소비자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산업에 진입해야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히스패닉계는 이제 부동산 에이전시, 병원 행정, 차량 판매, 심지어 은행까지 진출하고 있다. 그들의 커뮤니티 안에 있는 비즈니스는 ‘작은 시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전체 시장’을 바라보고 운영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자영업 위주고, 자산을 지키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다음 세대는 단지 상점을 지키는 게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한인 이민자로서, 같은 출발선에 섰던 멕시칸 이민자들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점점 존재감을 키워가는 모습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진다.

우리도 이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경쟁을 하자는 게 아니다. 서로의 강점을 인정하고, 이제는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되어야 할 때다.

미국은 결국 이민자들의 나라다.

누가 먼저 성공했느냐보다는, 어떻게 함께 살아남고 더 나아갈 수 있을지—그 해답을 찾는 게 지금 이 시대의 진짜 과제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그 정답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지금 우리가 방향을 다시 정비해야 한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