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는 캬바레 음악이 아니다, 블루스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 West Covina - 1

음악 얘기 하다가 블루스 나오면 이런 반응이 있다.

"아, 그거 술집에서 남녀가 붙어서 추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 말 들을 때마다 잠깐 멈추게 된다. 틀린 말은 아닌데...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라서.

솔직히 말하면, "술집 음악" 이미지가 왜 생겼는지는 이해가 간다.

블루스는 분명히 클럽에서 연주됐고, 관능적인 분위기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근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그게 블루스의 본모습이 아니라 진화 과정의 일부라는 거다.

블루스의 뿌리는 미국 남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농장 지대다.

하루 종일 목화밭에서 일하던 흑인 노동자들이 해가 지면 기타 하나 들고 인생 얘기를 풀어놓던 게 시작이었다.

사랑 얘기, 고향 그리움, 임금 착취, 버티기 힘든 하루. 그게 다 가사가 됐다.

댄스 플로어를 위한 음악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언어였다.

그러다가 도시화가 블루스를 바꿨.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대규모 흑인 북부 이주가 일어났다.

Great Migration이라고 부른다. 시카고, 디트로이트, 세인트루이스로 사람들이 몰렸고, 블루스도 함께 따라갔다.

시카고에 도착한 블루스는 달라졌다. 전기기타가 들어오고, 하모니카 소리가 커졌다. 클럽 무대에 올라갔고, 청중이 생겼다.

Muddy Waters, Howlin' Wolf. 이 시대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낸 사운드가 우리가 아는 "블루스"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클럽 문화와 엮이면서 관능적인 분위기가 붙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장르가 환경에 적응한 것이지, 장르의 본질이 바뀐 게 아니다.

블루스를 처음 제대로 들어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뭔가... 솔직하다"는 것.

맞다. 블루스는 인간의 욕망, 외로움, 분노, 좌절을 필터 없이 끄집어낸다.

사랑하고 싶다, 버리고 싶다, 혼자는 못 살겠다. 팝처럼 예쁘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 날것의 감정이 듣는 사람 마음에 직접 닿는다.

그게 "야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멜로디 때문이 아니라, 솔직함의 강도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숨겨두는 감정들을 블루스는 대놓고 노래한다.

그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야한 음악"으로 분류되는 거다.

미국 음악을 꽤 들었는데, 블루스만큼 제대로 파고들면 나오는 게 끝이 없다.

블루스를 "캬바레 음악"으로만 치부하는 건, 그 안에 쌓인 역사, 눈물, 저항을 전혀 모르는 소리인거다.

블루스는 그냥 장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솔직한 예술 형식 중 하나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