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틴에서 RINO를 욕하다가, DINO를 발견했다 - Austin - 1

텍사스에서 살다 보면 공화당 텃밭이라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집앞, 개러지 입구, 그것도 모잘라 픽업트럭에 성조기 달고 다니는 사람들, 민주당 LGBT 정책에 바로 반응하는 분위기.

전형적인 레드 스테이트의 풍경이다. 근데 오스틴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공기가 확 바뀐다.

오스틴은 텍사스 안의 딴 나라다.

진짜로. 시내 곳곳에 프라이드 플래그 걸려 있고, 카페마다 "Vote" 스티커에 민주당 색깔 포스터가 붙어 있고, 동네 술집에서 정치 얘기 꺼내면 십중팔구 진보 성향 사람들이다.

텍사스 주도가 이 도시인 게 공화당 입장에서는 매년 골치겠다 싶을 정도로.

근데 여기서 살면서 이상한 걸 하나 느꼈다. RINO 얘기를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 오스틴에도 똑같은 현상이 있다는 거다.

RINO가 뭔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Republican In Name Only. 말 그대로 이름만 공화당인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공화당 뱃지 달고 있는데 실제로는 큰 정부 지지하고, 세금 올리는 데 찬성하고, 선거 때만 공화당 표 챙기는 정치인들. 보수 진영에서 이 단어는 거의 욕에 가깝다. "저 사람 RINO야"라고 하면 신뢰 못 할 기회주의자라는 뜻이니까.

트럼프가 이 단어를 특히 즐겨 썼는데, 덕분에 더 유명해졌다. 공화당 내부에서 자기 편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딴소리 하는 사람들을 솎아내는 용도로 쓰이는 단어다. Bottom line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조롱이다.

오스틴에서 발견한 DINO들

근데 오스틴 살다 보니까 이게 공화당만의 문제가 아니더라. Democrat In Name Only. DINO. 이 도시에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 입으로는 기후 변화 걱정하면서 일주일에 세 번은 SUV 몰고 다닌다. SNS에는 affordable housing 지지 포스팅 올려놓고, 정작 자기 동네에 저소득층 아파트 들어온다고 하면 제일 먼저 반대 서명한다. "우리 지역사회를 위해 싸운다"는 말은 진심인데, 그 지역사회가 현재 집값 유지되는 동네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오스틴 부동산 시장 보면 이게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 도시가 지난 10년간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알면 놀란다. 민주당 성향 도시 행정부가 계속 들어서는 동안 주거비는 폭등했고, 정작 저소득층 서민들은 오스틴을 떠나고 있다.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는 도시에서 벌어지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아이러니다. ROI 계산에는 밝은데 equity 얘기는 선거철에만 한다.

테크 붐이 만들어낸 특이한 계층

오스틴에 테크 기업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 현상이 더 심해졌다. 실리콘밸리에서 넘어온 테크 워커들, 원격 근무로 LA나 시애틀에서 이주한 사람들. 이들 중 상당수가 정치적으로는 민주당 지지를 표방한다. 근데 행동 패턴을 보면 전형적인 자산 보호 논리로 움직인다.

텍사스 와서 세금 낮은 거 좋아하면서 복지 확대 얘기한다. 규제 없는 시장 덕에 스타트업 차려놓고 대기업 규제 강화 지지 포스팅 올린다. 이거 BS 아닌가? 내가 IT 업계에서 15년 넘게 있으면서 이런 패턴 꽤 봤다. 자기 이익에는 철저하게 자유시장 논리 적용하고, 남들 얘기할 때는 progressive 코스프레 하는 거.

텍사스 공화당 RINO들이 선거 때만 보수인 척한다고 욕먹는 거랑 구조가 똑같다. 그냥 반대편에 있을 뿐이다.

정치 레이블의 공허함

결국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레이블이 실제 행동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RINO가 문제인 이유는 공화당이어서가 아니라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스틴의 DINO들이 문제인 것도 민주당이어서가 아니라 같은 이유에서다.

텍사스 레드 스테이트 한복판에 있는 블루 시티에서 살다 보니까 이 아이러니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념 싸움인 척하는데 실제로는 기득권 싸움인 경우가 너무 많다. 진보든 보수든 자기 자산과 지위가 흔들릴 것 같으면 다들 비슷하게 행동한다. 그냥 다른 언어를 쓸 뿐이다.

RINO 욕할 자격은 DINO 없는 사람한테 있다. 근데 솔직히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스틴 살면서 드는 시니컬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