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하고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지만 이젠 미국에 온 지 15년이 넘어간다.
좋은 인연을 만나 미국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열심히 살다보니 이젠 제법 실무영어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제 기술발달로 복잡한 계획서는 모두 AI로 만들고 이메일도 ChatGPT로 문법을 꼼꼼하게 확인한다. 그래도 아직 뉴스 보다가 모르는 단어 나오면 검색부터 해보는건 여전하다. 관용어는 아직도 모르는 표현이 태반이고.... 특히 내 생각을 영어로 설명하는 건 1분을 넘기기 정말 힘들다. 그렇다보니 네티브와 속 깊은 이야기는 전혀 안하게 되고...
그런다 보니 나는 미국 사회에 속하려고 애쓴다. 미국 교회에 다니고있고 미국 성경모임에도 꼭 참석한다. 회사 직원들의 결혼식에도 항상 참석하고 미국적인 교류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중이다.
그런데 한인들을 보면 한인 커뮤니티 안에만 갇혀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듯 하다. 같은 말 쓰고 같은 음식 먹고 같은 정서 공유하니까 편한 건 맞다. 마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아이들 교육이나 부동산 이야기로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친구. 이건 미국 사회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안정감이다. 하지만, 이 편안함이 때론 '울타리'가 되어버린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나 엘에이, 달라스, 애틀란타 같은 대도시에서는 한국 마트, 한국 병원, 한국 교회, 한국 학원까지 다 있으니 굳이 영어 못 해도, 미국 사람 안 만나도 산다. 심지어 일부 한인들은 미국 회사가 아닌 한인 회사만 다닌다. 생활 반경이 완전한 '작은 한국'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10년, 20년이 지나도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는 거의 없고, 영어는 늘 제자리걸음이라는 점이다. 미국 뉴스는 흘려듣고, 정치나 문화는 남 얘기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백인, 흑인, 히스패닉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부모 세대는 여전히 그들과의 거리감 속에 있다.
물론 이민의 어려움을 모르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생존이 우선이다. 그렇지만 그 생존이 너무 길어지면,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습관'이 되어버린다.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고, 더 이상 시도하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미국 사회가 그냥 외국처럼 느껴지고, 미국인 친구는 생기지 않고, 자녀와의 문화적 간극도 점점 커진다.
내가 답답한 이유는 이런 현실이 한두 명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인 커뮤니티는 때때로 우리 스스로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 '성(城)'을 쌓고, 그 안에서만 안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밖을 보면 무섭고, 안을 보면 익숙하니까. 나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적어도 미국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미국식 농담이 뭔지,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뭔지를 알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한인 커뮤니티는 분명히 소중한 자산이다. 고향 같은 공간이고,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위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그 편안함이 내 성장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가끔은 울타리 바깥으로 한 발자국 나가보면 어떨까.
비록 발음이 매끄럽지 않아도, 미국 뉴스 하나 끝까지 못 들어도, 미국 친구와 어색한 침묵이 생겨도. 그 불편함 속에서 진짜 이민자의 삶이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더 이상 '손님'이 아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주인'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커뮤니티 안의 안락함에만 머무르지 말고, 그 바깥 세상도 내 세상이라 생각하고 살아보자.
익숙한 편안함이 결과로 볼때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