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한 15년 살다 보니 영어를 꽤 오래 썼다고 생각했는데도, 가끔은 뭐 이런게 다있나 싶은 순간이 와요.

그중 하나가 바로 your honor라는 표현이죠. 처음엔 당연히 판사한테만 쓰는 말인 줄 알았어요. TV 드라마나 뉴스에서 법정 장면 보면 늘 "Yes, your honor" 하니까요.

그래서 저 말은 법정 전용, 판사 전용, 아무나 쓰면 안 되는 말인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살다 보니 시장한테도 your honor라고 하고, 시의회 공식 회의에서도 쓰고, 심지어 판사 아닌 사람한테도 자연스럽게 쓰이더라고요. 미국에서 your honor는 생각보다 쓰이는 범위가 꽤 분명해요.

가장 대표적인 건 역시 법정이에요. 판사에게 말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your honor를 씁니다. 변호사, 검사, 피고인, 증인까지도 판사에게 직접 말할 때는 "Yes, your honor", "No, your honor"가 기본이에요. 이름도, 직함도 안 쓰고 그냥 이 표현 하나로 통일돼요. 이건 개인에 대한 존칭이 아니라 법원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존중이라는 의미가 강해요.

두 번째는 판사가 법정 밖 공식 행사에 참석했을 때예요. 예를 들어 시 행사, 기념식, 공청회 같은 자리에서 판사가 단상에 올라 발언하면, 사회자나 공식 발언자는 여전히 your honor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이때도 "Judge 누구"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전통적으로는 your honor가 더 격식을 갖춘 표현이에요.

세 번째는 일부 지방정부 공식 회의에서 시장이나 시의회 의장을 부를 때예요. 특히 시의회 회의록이나 정식 발언에서는 시장에게 your honor를 쓰는 도시들이 아직 있어요. 이건 연방법이 아니라 각 도시의 관행에 가까워서, 어떤 도시는 쓰고 어떤 도시는 안 써요. 그래서 처음 접하면 "어? 판사도 아닌데?" 하고 당황하게 돼요.

네 번째는 법률 문서나 공식 회의록이에요. 실제 대화에서는 덜 쓰더라도, 기록으로 남기는 문서에서는 여전히 your honor가 등장해요. 특히 법정 속기록이나 시의회 공식 기록에는 아주 깔끔하게 남아 있어요.

반대로 안 쓰는 경우도 분명해요. 경찰, 검사, 변호사에게는 쓰지 않아요. 주지사, 연방의원, 시장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your honor라고 부르면 오히려 어색해요. 이메일이나 일상 대화에서 쓰면 거의 100% 과장된 농담이나 풍자로 받아들여져요.

한국에서도 이젠 각하라는 말, 이제 거의 안 쓰잖아요. 예전에 대통령이나 높은 장군들을 각하라고 부르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그 표현 쓰면 뉴스 댓글에서 바로 난리 나요. 너무 권위적이다,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말부터 나오죠. 정치인도, 공무원도 이제는 직함으로 부르는 게 당연해졌고, 말도 많이 평평해졌어요.

그런데 미국은 왕도 없고 귀족도 없다고 늘 말하면서, 말은 왜 이렇게 귀족 사회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어요. your honor라니요. honor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거창해요. 집에서 아이 숙제 챙기고, 장 보러 다니는 평범한 가정주부 입장에서는 더 그래요.

오늘 시청 회의에서 주차 문제로 언성 높이던 사람이, 마이크 잡는 순간 갑자기 '명예'의 상징이 되는 느낌이에요. 한국에서 시장한테 "각하"라고 불렀다간 바로 뉴스감인데, 여긴 그게 일상이라니 참 묘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미국이 사람보다 직위를 더 중시하는 문화라서 그런 것 같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보다, 지금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느냐가 먼저예요. 그래서 개인 감정이나 인간적인 면과는 상관없이, 직위에 붙은 호칭은 그대로 존중해요.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하필 your honor인 거고요. 한국은 각하라는 말을 버리면서 권위를 내려놓는 쪽으로 갔는데, 미국은 말만 보면 아직 권위를 꽤 소중히 들고 있는 느낌이에요.

재미있는 건 미국 사람들도 이 말을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진짜로 "이분은 고결한 명예의 화신입니다"라는 뜻으로 쓰는 게 아니라, 그냥 관습이라 쓰는 거예요. 한국에서 "수고하세요"를 의미 따지지 않고 쓰는 것처럼요. 그래도 외국인 눈에는 이런 게 다 보이잖아요. 왜 이런 구시대 표현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을까 하고요.

결론은 한국은 각하라는 말을 버렸고, 미국은 your honor를 아직 붙잡고 있어요. 누가 더 맞다 틀리다기보다는 다른 길을 가는구나 싶어요.

그래서 투덜거리면서도 막상 입 밖으로는 "Yes, your honor" 하게 되는 게 미국 생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