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드라마 '파인'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원래 나는 이 드라마의 원작 웹툰을 꽤 열심히 본 편이었다.
미생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다 보니 연재될 때마다 챙겨볼 정도였고, 원작의 흐름과 인물 관계를 웬만큼 꿰고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화 소식이 나왔을 때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원작을 너무 좋아하면, 드라마가 조금만 엇나가도 실망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 '엇나감'이 오히려 묘하게 좋았다.
제작진이 원작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몇 가지 설정을 과감하게 비틀고 살을 붙여서 전혀 다른 결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1회에서 장벌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원작에서는 2회에 황태산과 만나면서 처음 나오는 캐릭터인데, 드라마에서는 오희동이 행운다방 앞에서 장벌구 일당과 맞닥뜨린다.
"어이, 외지 양반! 넘의 여자한테 껄떡대지 마쇼잉. 뒤지는 수가 있응께"라는 대사는 그 사투리 맛이 너무 강렬해서 배우가 된것같은 유노윤호(정윤호)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에 딱 박혔다.
원작 팬인 나조차도 "이건 신의 한수다" 싶을 정도로 강한 오프닝 카드였다.
그리고 김 교수의 활약은 드라마에서 더 대담해졌다.
원작 속 김 교수도 꾀 많고 수완 좋은 캐릭터였지만 시리즈에서는 세관 직원과 손잡고 사기를 치고 부산 골동점에서 야쿠자의 양아들을 속여 일본도와 총을 빼앗는 장면까지 추가됐다.
이건 진짜 원작에는 없는, 시리즈만의 독창적인 에피소드였다. 이런 장면 덕분에 오관석이 김 교수만 봐도 긴장하는 모습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캐릭터의 배짱과 사기술이 디테일하게 살아나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손에 땀을 쥐게 된다.
또 한 가지 반가운 변화는 양정숙 캐릭터였다.
원작에서는 그냥 현재 시점의 인물로만 나왔는데, 드라마에서는 흥백비니루 시절 경리로 일하던 과거가 그려진다.
그 과거를 통해 임전출과의 연결고리가 보강되고 한밤중 맥주를 마시며 오희동과의 일을 회상하는 장면도 추가됐다.
심지어 진 사장과 함께 미군부대 골동품 경매에 가서 욕망에 눈뜨는 장면까지... 원작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입체적인 변주였다.
덕분에 임수정의 연기가 더 빛났다. '양정숙 그 자체'라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박선자와 오희동의 관계 변화도 흥미로웠다. 원작에서는 그저 주변 인물에 가까웠는데, 드라마에서는 서로의 정서적 안식처가 되는 관계로 확장됐다.
원래김 교수의 총 이야기를 스치듯 꺼내는 정도였지만 시리즈에서는 오희동이 서울에서 사 온 스카프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 얘기를 꺼낸다.
박선자가 다방에서 오희동을 떠올리다가 그의 옷을 챙겨 무작정 증도로 가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감정의 폭발이었다.
탐욕으로 가득 찬 인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보여주는 두 사람의 관계는, 강윤성 감독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아주 선명하게 담아냈다.
원작 팬으로서 이런 변주를 보고 있으면, 묘한 쾌감이 있다. 내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예상치 못한 전개와 추가 장면이 계속 나와서 지루할 틈이 없다.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그 사이에 훨씬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 돌아온 느낌이라고 할까.
덕분에 나는 매주 '파인'을 기다리며 살았다. 마지막 회가 곧 공개된다고 하니, 솔직히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원작과 드라마가 서로의 장점을 살려 공존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걸 알기에, 이번 작품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이쯤 되면, 나 같은 원작 팬에게 드라마 '파인'은 그냥 영상화된 판본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세계선' 같은 존재다.
그래서인지 이번 드라마를 본 후 다시 원작을 정주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또 다른 관점에서, 두 작품을 비교하며 즐기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