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진짜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느낌.

머리는 돌아가는데 생각은 정리가 안 되고, 가슴은 답답하고, 뭐라도 안 하면 미쳐버릴 것 같은 밤 말입니다.

그럴 때 와인 생각? 안 납니다. 맥주? 아닙니다. 그런 날은 그냥 센 거 하나 생각납니다.

팬데믹 때 친구 하나가 그랬습니다. 주식하다가 마진콜 맞고, 5년 모은 돈이 일주일 만에 전부 날아갔습니다.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돼서 밤에 집에 갔더니 테이블 위에 짐빔 화이트 한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반쯤 비어 있었고, 안주는 없었습니다. 눈은 충혈돼 있고, 말은 짧았습니다.

"야, 한 잔 해."

그날 분위기에서 와인 따겠습니까. 얼음 넣고 칵테일 만들겠습니까.

그냥 뚜껑 따고, 스트레이트로 벌컥입니다. 한국에서 깡소주 원샷하듯이 미국에서는 그게 짐빔 화이트입니다.

이건 겪어본 사람만 압니다. 병 하나 사서 집에 오는 그 심정.

어디 말할 사람도 없고, 전화할 기분도 아니고, 그냥 병 하나랑 나만 있는 상태.

짐빔 화이트를 neat로 넘기면 목이 바로 탑니다. 버번 특유의 옥수수 단맛이 잠깐 스치고, 그 다음은 알코올이 식도를 쭉 긁고 내려갑니다. 40도입니다. 소주보다 훨씬 셉니다. 그래서 많이 마실 필요도 없습니다.

한 모금이면 됩니다.

그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머리가 잠깐 멈춥니다. 진짜로 5초 정도 생각이 딱 끊깁니다.

계산도 멈추고, 후회도 멈추고, 불안도 멈춥니다. 답을 찾는 게 아닙니다. 그냥 일시정지입니다.

옆에 휴대폰은 꺼져 있고, 누구한테 하소연할 생각도 없습니다.

상담? 위로? 그런 거 생각 안 납니다. 지금은 그냥 멈추고 싶은 겁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힘들면 상담 받으라고. 맞는 말입니다. 너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은, 총 맞은 사람한테 "병원 가세요"라고 하는 느낌입니다. 맞는 얘기인데, 지금 피가 흐르고 있잖습니까.

짐빔 한 모금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건 지혈입니다. 응급처치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내일 아침이면 숙취와 함께 현실이 다시 돌아옵니다. 계좌도 그대로고, 문제도 그대로입니다. 인생이 좋아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밤만큼은, 이 한 모금이 유일한 정지 버튼일 때가 있습니다. 잠깐 멈추고, 숨 한번 고르고, 머리 식히는 시간.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닙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병 하나랑 마주 앉는 밤이 있습니다. 그 밤을 버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