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줄을 넘으니 뭐든 보이는 게 예전하고는 좀 다르게 보입니다.
젊었을 땐 빌딩이란 그냥 "와 높다" 한마디로 끝났는데, 건축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 세월이 쌓이다 보니, 높은 건물 하나를 봐도 저놈이 어떤 사연으로 저기에 서 있는지, 어떤 맥락 속에서 자리 잡았는지를 곱씹게 되더라고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한국의 자랑이자 서울의 랜드마크로 굳건히 자리한 롯데월드타워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서울 송파구 잠실에 우뚝 선 롯데타워, 높이가 무려 555미터, 123층짜리 건물입니다.
지금이야 뉴스며 잡지며 수도 없이 다뤄져서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아는 건물이 되었지만, 제가 처음 도면과 모형을 봤을 땐 그야말로 '서울이 이렇게까지 갔구나' 싶은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한국이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고층빌딩 하면 63빌딩 정도가 상징이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초고층 건축물이 서울 하늘에 솟아 있으니, 그 자체로 국가적 자부심을 느낄 만합니다.
전문가 시선으로 보면, 롯데타워는 단순히 높이만으로 승부한 건물이 아닙니다.
한강, 남산, 석촌호수 등 서울의 풍경과 어우러지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 참 흥미롭습니다.
외관은 전통 도자기 곡선을 모티브로 해서 부드럽게 위로 솟아오르는데, 그 덕에 웬만한 초고층 건물에서 흔히 보이는 차갑고 각진 인상 대신 한국적인 곡선미가 살아 있어요.
또 건물 내부는 백화점, 호텔, 오피스, 전망대, 문화 시설이 다 들어가 있는 복합체라서 단순히 "높다"라는 가치에 그치지 않고, 서울의 경제와 문화가 응집된 하나의 작은 도시 같은 역할을 하고 있죠.
이제 제가 사는 로스앤젤레스 이야기를 해봅시다. 엘에이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윌셔 그랜드 센터(한진빌딩)인데, 335미터, 73층입니다.
물론 서부 최대 도시의 상징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제가 다운타운을 걸을 때마다 '여기에 롯데타워가 서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자주 합니다.
롯데타워의 555미터 높이는 그냥 압도적이거든요.
엘에이 하늘은 원체 넓고 탁 트였는데, 거기서 그 정도로 우뚝 솟은 건물이 하나 자리했다면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뉴욕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시카고는 윌리스타워(옛 시어스타워)가, 두바이는 부르즈 칼리파가 도시의 얼굴이라고. 서울은 이제 단연코 롯데타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엘에이도 지금은 한진빌딩이 상징이긴 하지만, 그 높이와 존재감만 놓고 본다면 솔직히 조금은 아쉬운 점이 있어요.
US 뱅크 빌딩 보다 약간 높아서 비슷해 보이다보니 그렇죠. 555미터짜리 롯데타워가 이곳 다운타운 중심에 서 있었다면, 할리우드 간판보다도 더 확실한 랜드마크로 전 세계 관광객들을 불러 모았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물론 엘에이의 도시 맥락을 생각하면 롯데타워 같은 초고층 건물이 꼭 맞았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엘에이는 땅이 넓고 수평적으로 발전한 도시라, 서울처럼 고밀도의 초고층 건물이 필요한 환경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상상은 자유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 자리에 롯데타워가 있었다면?' 생각할 때마다 제 건축가의 심장이 두근거려요.
롯데타워를 보면서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안전과 기술 문제입니다.
서울은 지진 위험이 크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555미터 건물을 짓는 건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내진 설계, 풍동 실험, 첨단 자재, 수많은 기술자가 동원됐죠.
게다가 공사 과정에서 오랜 기간 논란과 반대도 많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공 후에는 명실공히 서울의 얼굴로 자리 잡았으니, 건축이란 게 단순히 콘크리트와 철골만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상징성까지 포함한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저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뭐든 쉽게 흥분하지 않는 편인데, 솔직히 한국 갈 때마다 석촌호수 건너편에서 롯데타워를 바라보면 가슴이 벅차올라요. 그 높은 건물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하늘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참 장엄합니다.
미국에서 살아도, 고국의 그 랜드마크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되죠.
엘에이에서 건축을 보며 평생을 살아왔지만, 제 마음 한켠에는 항상 서울의 풍경이 자리합니다. 그리고 그 풍경 한가운데, 이제는 단연코 롯데타워가 있습니다.
언젠가 엘에이에도 저런 스케일의 건물이 들어설 날이 올까요.
아마 쉽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