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의 무시로, 노래가 아니라 인생을 부르는 가수 - Denver - 1

요즘 한국에서 콘서트 하면 임영웅이 대단한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한번 열린다고 하면 온라인에서도 공연 표 구하기도 어렵고,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다고 하니 대단한 가수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 세대에게는 그보다 먼저 나훈아라는 이름이 있었다.

나는 지금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가끔 옛날 한국 노래를 들으면 순식간에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그중에서도 나훈아의 노래는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그만의 그루브와 독특한 바이브가 살아있다.

나훈아는 내 기준으로 볼때 정말 가사를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아마 천부적인 재능일것이다.

요즘 가수들은 고음을 얼마나 높이 올리는지, 음색이 얼마나 독특한지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훈아는 다르다.

평범한 가사 한 줄도 그가 부르면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가 된다.

목소리에 힘을 주다가도 어느 순간 슬쩍 힘을 빼고, 단어 하나를 길게 끌다가 툭 내려놓는다. 그 미묘한 차이에서 감정이 전달된다.

흔히 한국 사람에게는 '한(恨)'이라는 특유의 정서가 있다고 한다.

뭐 사실 어느 나라 사람에게나 슬픔과 후회는 있다. 다만 한국의 예전 가요에는 그런 감정을 풀어내는 독특한 방식이 있는 것 같다.

나훈아가 바로 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가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무시로

나훈아 노래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무시로'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신나는 트로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슬픈 노래도 아니다. 한 사람이 오랜 세월 마음속에 품고 살아온 이야기를 조용히 털어놓는 듯한 노래다.

무시로라는 말부터 참 좋다. 일정한 때가 없이 수시로, 문득문득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살아보면 그렇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다.

회사에서 힘든하루 보내고 집으로 오는 프이웨이에서 운전하다가 생각나고, 혼자 밥을 먹다가도 생각난다.

대부분 그냥 떠오르고 짠해지는거지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기억이 불쑥 올라오는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바로 그런 감정을 잘 이야기하는것 같다.

무시로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

이미 때늦은 이별인데
미련은 두지 말아요

눈물을 감추어요 눈물을 아껴요
이별보다 더 아픈 게 외로움인데

무시로 무시로
그리울 때 그때 울어요

이미 돌아선 님이라면
미워도 미워말아요

이미 약속된 이별인데
아무 말 하지 말아요

눈물을 감추어요 눈물을 아껴요
이별보다 더 아픈 게 외로움인데

무시로 무시로
그리울 때 그때 울어요
'무시로'는 지나간 사랑을 잊으려 해도 쉽게 잊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리움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래 속 화자는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을 떠올리면서도 그 기억에 계속 매달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잊어야 한다는 생각과 잊히지 않는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이런 가사가 별로 와닿지 않았다. 사랑이 끝났으면 끝난 것이고, 헤어졌으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육십을 넘으니 사람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함께 살았던 사람, 좋아했던 사람, 한때는 평생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남이 된다. 그렇다고 함께 보낸 시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시로'가 좋은 이유는 이런 기억을 억지로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사랑을 되찾겠다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원망하며 울부짖지도 않는다. 오히려 잊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잊으려고 애쓰는 모습 자체가 아직 잊지 못했다는 증거다.

나훈아의 무시로, 노래가 아니라 인생을 부르는 가수 - Denver - 2

나는 이 모순이 참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머리로는 이미 끝난 일이라고 정리해 놓고도 마음으로는 오래 붙잡고 산다.

세월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오래된 노래 한 곡을 듣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기도 한다.

나훈아는 이런 감정을 지나치게 꾸미지 않는다.

목소리를 거칠게 밀어 올릴 때는 오래 참아온 감정이 느껴지고, 부드럽게 내려놓을 때는 이제 그만 잊어보려는 체념이 들린다.

그래서 같은 가사라도 다른 가수가 부르면 단순한 이별 노래로 들리는데, 나훈아가 부르면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처럼 들린다.

내가 생각하는 한이라는 정서도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 돌아오라고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없다.

세월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옛날 한국에서 알던 사람들과 연락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고, 누군가는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매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떠오른다.

그럴 때 '무시로'라는 제목만큼 정확한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젊은 시절의 사랑뿐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시간까지 함께 생각난다.

결국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면 그 사람과 함께했던 젊은 날의 나 자신인지도 구별하기 어렵다.

나훈아의 '무시로'는 바로 그런 나이에 더 깊게 들리는 노래다.

나훈아의 무시로, 노래가 아니라 인생을 부르는 가수 - Denver - 3

화려했던 여자 관계와 굴곡 많은 사생활

나훈아의 인생도 노래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잘생긴 외모에 남성적인 매력까지 있었으니 젊은 시절 여성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실제로 그의 이름 뒤에는 늘 여자 이야기가 따라다녔다.

세 차례 결혼했고, 배우 김지미와의 결혼과 이혼은 당시 연예계의 큰 화제였다. 마지막 결혼 역시 긴 법적 다툼 끝에 이혼으로 마무리됐다.

흔히 여자 편력이 화려했던 가수로 기억하지만, 소문과 실제 확인된 사실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의 복잡한 애정사가 노래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다만 사랑과 이별을 여러 번 겪은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서 그런지, 내 귀에는 가사가 더 절실하게 들린다.

나훈아의 무시로, 노래가 아니라 인생을 부르는 가수 - Denver - 4

은퇴가 아쉬운 가수, 그래도 노래는 남았다

나훈아는 2025년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났다.

아쉽다. 그만한 가창력과 무대 장악력을 가진 가수를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트로트를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쿵짝거리는 반주에 맞춰 흥을 돋우는 노래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나훈아는 다르다. 그의 노래에서는 흥보다 인생의 결을 헤집는 한이 느껴진다.

다행히 요즘은 유튜브가 있다.

덴버 집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오래된 공연 영상을 무료로 찾아볼 수 있다.

젊은 시절 나훈아의 목소리도, 나이 들어 부르는 노래도 들을 수 있다.

예전 같으면 한국에서 공연할 때를 기다려야 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이가 육십을 넘으니 노래를 듣는 기준도 달라진다. 얼마나 잘 부르는가보다 얼마나 내 마음을 건드리는가가 중요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훈아는 내게 여전히 가수 중의 가수다.

그리고 그 많은 명곡 중에서도 나는 오늘 역시 '무시로'를 듣는다.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릴 수는 없어도, 그 시절의 감정을 잠시 떠올릴 수는 있으니까.